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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대史 전쟁]<7> 동북공정의 논리 ③고구려·中의 조공과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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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대史 전쟁]<7> 동북공정의 논리 ③고구려·中의 조공과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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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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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고구려를 중원 왕조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근거의 하나로 중국 왕조와 고구려의 책봉(冊封)―조공(朝貢) 관계를 들고 있다.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중화관(中華觀)에 입각해 고구려를 신하의 나라로 보고 양국의 외교관계를 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쪽 역사 기록의 조공과 책봉 기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원 왕조의 복속국이 된다. 중국은 먼저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했기 때문에 결국 중국 영토 안에서 시작한 셈이며, 건국 직후부터 시종일관 한(漢)에 귀속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현도군 요동군을 침공하는 기사는 소극적으로 해석하거나 외면하고 양국의 전쟁은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관구검(위나라의 무장으로 244년 고구려를 침공)의 고구려 침공 기사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이다.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이 보편적으로 전개되는 시기는 중국의 남북조시대(420∼589)이다. 그래서 중국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책봉제가 강화되는 시기로 파악한다. 즉 고구려는 4세기 이후에도 계속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았고 이는 고구려왕이 중원 정권의 관리로 고구려인을 다스린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북위(北魏)가 수여한 '동이교위(東夷校尉)'라는 책봉호를 예로 들어 고구려가 중원 정권을 대표해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민족을 관할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 대신 고구려는 매년 북위에 조공해 신하의 예를 다했다는 것이다. 또 고구려는 남북조시대에 중원 국가들과 큰 충돌이 없었는데 이 역시 우호교류를 추구한 중원 왕조의 개명(開明)한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도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대한 신하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본다.

고구려는 중국 군현과 갈등하며 발전

조공―책봉제에 입각해 고구려를 중원 왕조에 복속한 지방 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조공―책봉의 역사적 실상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책봉과 조공은 본래 중국 내부에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사이에 형성된 정치 질서지만 점차 확대되어 국가간의 외교 형식으로 발전하게 된 점을 유의해야 한다.

후한대에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를 보면 고구려는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현도군에 소속된 제후국이 아니라, 현도군과 대결하며 건국하고 발전했다. 즉 고구려의 중심부에 있던 제1현도군이 흥경의 제2현도군으로 다시 무순지역의 제3현도군으로 밀려나는 과정 자체가 곧 초기 고구려의 성장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고구려는 현도군과 요동군에 공세를 계속했다. 특히 242년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군을 잇는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고, 이를 계기로 지금 베이징(北京) 인근 지역을 관할하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까지 침공한 사실은 양국의 대결 상황을 잘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발전에 획기적인 기반이 마련된 한반도 서북부의 장악도 313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아가 중국 화북지역이 5호16국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에도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나라인 전연(前燕) 및 후연(後燕)과 대립, 요동·부여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공방을 거듭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중국 군현의 관계는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화평관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긴장된 관계였다.

조공 기록은 실제는 국가간 외교행위

이어 조공―책봉제가 확대되는 남북조시기를 살펴보자. 중국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조공―책봉 관계가 강화되는 시기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중국 세력이 분열되어 주변 국가에 대한 규제력이 약화된 상황이기 때문에 조공―책봉은 실질적인 종속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와 중국의 여러 왕조 사이에 맺은 외교 관계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조공'이란 표현도 실제 조공과는 관계없는 외교적 행위를 중국 측에서 '조공'으로 표현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시기 조공―책봉 관계가 확대된 것은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힘으로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이를테면 고구려와 북위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교섭의 횟수가 많다. 이보다는 못하지만 서역의 토욕혼(吐谷渾)과 북위의 교섭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도가 높다. 언뜻 보면 이런 모습은 조공―책봉 관계를 가장 잘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토욕혼은 당시 북위을 둘러싼 주변 제국 중 최강국이었으며 다른 어떤 국가보다 정치적으로 독자성을 가진 국가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구려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남조 국가와도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면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구사했고, 또 북위를 위협하는 북방의 유목국가와도 독자적으로 교섭을 지속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당시 다원적인 국제 질서를 움직여가는 중심 축의 하나를 이루게 된다.

고구려와 북위의 교섭 횟수를 보면 양국의 관계가 지극히 우호적으로 전개된 듯하다. 하지만 갈등과 충돌의 계기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 북위가 고구려에게 기대하는 신하의 태도와 고구려가 북위에게 취하는 독자성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생기면서 빚어진 갈등이다. 조공―책봉은 중원의 왕조가 요구하는 명분상의 신속(臣屬) 관계일 뿐이며, 고구려는 실질에서 독자성을 갖는 국가 체제라는 자각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고구려 독자 세력권 인정

북중국 왕조는 책봉호를 통해 고구려의 독자성을 인정했다. 역대로 고구려가 받은 책봉호가 사상 최고위인 예가 많았던 것이나, 동방 사회에 대한 대외 업무를 관장하던 관직인 '동이교위'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郞將)'을 부여한 점, 그리고 동북방에서는 고구려 외에는 어떤 국가나 정치 집단에게도 책봉을 하지 않은 사실 등에서 북위가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잘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공―책봉제는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서 적용된 외교 형식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유독 고구려만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기도 하다. 백제나 신라, 왜가 중국의 왕조와 맺고 있는 조공―책봉 관계와 고구려가 맺고 있는 조공―책봉 관계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조공―책봉이란 형식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 된다면 백제나 신라와 왜 역시 중국의 지방 정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자신의 세력권 안에 여러 국가나 세력 집단을 포함했으며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갖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조공―책봉 관계는 이념적으로 중화 질서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런 중국 중심의 이념은 고구려가 갖고 있던 천하관과 충돌할 개연성이 크다. 즉 고구려는 자신의 독자적 세력권을 설정해 신라와 백제 등에 조공 관계를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조공―책봉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 중원 왕조에 복속했다고 인정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수와 당이 고구려에 요구하는 조공―책봉의 관계는 이전과는 다르다. 중원의 통일 왕조로 주변 여러 나라에 힘을 행사했던 양국은 고구려에 실질적인 신속을 요구했고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중국 중심의 중화적 질서를 무력으로 실현코자 했다. 고구려와 수·당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학계가 조공―책봉을 통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논리는 역사 해석의 기본적인 태도인 실증적인 사료 분석에 근거하지 않고 있어 논거가 매우 취약하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 시기의 조공―책봉 현상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임 기 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 남북조시대 책봉의 유형

남북조 시기 주변국에 대한 책봉은 중국 왕조가 일방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책봉 받는 국가의 요구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백제와 왜(倭)다. 백제는 남조와 교류하면서 왕은 물론 왕족이나 신하의 관작까지 책봉해 줄 것을 자주 요청했다. 이 경우 미리 백제왕이 신하들에게 관작을 주고 이를 남조에 인정해주도록 요구하는 방식이었으며,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개로왕 때와 동성왕 때의 사례가 '송서'와 '남제서'에 전한다.

왜의 경우는 또 다르다. 당시 왜왕들은 남조 송에 조공하면서 책봉호를 호화스럽게 만들어 이를 인정해 주도록 요구했다. 이때 왜왕은 스스로 칭한 책봉호에 백제와 신라, 가야 등 이웃나라를 마치 자신이 다스리는 것처럼 과장하여 관작(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을 요청했고, 송이 이를 무시해 왜국왕만 인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뒤 다시 왜왕이 요청했을 때는 송과 외교관계를 맺은 백제만 제외하고 나머지 나라를 포함하는 책봉 관작을 내린 사례가 있다. 이 기사는 한 때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됐다.

이같이 남북조 시대의 책봉은 책봉 받는 나라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고, 나라마다 그 모습도 여러 가지여서 실제로 지배하고 복속하는 관계라기보다 외교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바로잡습니다

3일자 '한중 고대사 전쟁<6>' 사진설명 중 우북평은 요동 5군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성이 아니라, 여러 성 중의 하나이므로 바로잡습니다. 또 고구려 전성기 지도는 서북쪽으로는 대흥안령 산맥, 동북으로는 소흥안령 산맥 인근까지인데 영역이 지나치게 넓게 표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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