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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15회 혈전끝 무너진 "챔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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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15회 혈전끝 무너진 "챔프의 꿈"

입력
2004.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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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14일-김현치 세계도전 석패관중 2만명이 들어 찬 필리핀 마닐라 교외 아라네타 체육관에서 30세의 노장 김현치가 홈링의 WBA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벨 빌라폴로(22)와 맞섰다.

초반 김현치는 좌우 연타를 앞세운 맹공을 펄치고, 왼손잡이 빌라폴로는 긴 리치로 김의 접근을 봉쇄하며 기회를 엿봤다.

우세하게 경기를 이끌던 김현치는 5회 종료 10여초 전 강한 레프트 훅을 빌라폴로의 턱에 날렸다. 상대가 휘청하는 듯 했으나 승부를 결정짓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이후 김현치가 착실히 포인트를 쌓아 승리가 예견되던 경기는 9회 들어 단숨에 전세가 뒤집혔다. 뒤로 물러서며 반격을 엿보던 김의 턱에 회심의 펀치가 날아든 것.

불의의 일격에 김현치는 쓰러졌고, 결국 한 회에 3차례 다운을 당했다. 마치 술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김현치는 정타를 한대만 맞으면 KO당할 상황이었으나 흥분한 빌라폴로의 큰 펀치가 몸에 빗맞는 바람에 최악의 경우는 모면한 것. 초인적 의지로 가까스로 고비를 넘긴 김현치는 10회 상대 글러브가 찢어져 경기가 중단된 틈에 정신을 가다듬고 15회 판정까지 버텼으나 결과는 1-2패, 김기수 홍수환 다음으로 세 번째 챔피언을 노린 노장의 투혼은 빛을 잃었다.

김현치는 공수 테크닉이 완벽한 복서였다. 동아대 1년때 데뷔해 70년 세계 군인선수권과 아시아선수권 우승, 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라이트급 금메달과 최우수선수등 화려한 이력을 쌓고 92승5패로 아마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71년 26세에 프로에 전향했다. 프로의 전적도 빌라폴로와 맞붙기 전까지 23전 전승이었기에 그의 패배는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1990년 3월 9일-한필화 남매 상봉

북한의 한필화는 한국의 동계종목 경기 수준이 감히 세계 정상을 넘겨 보지도 못하던 64년, 인스부르크 올림픽의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은메달을 획득한 세계적 스타로 70년 유니버시아드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가 남쪽에 알려진 것은 경기 성적보다는 이산가족이기 때문이었다. 71년 2월 삿포로 프레올림픽때 그는 남쪽의 대표선수였던 여중생 김영희의 이모로 알려졌다. 매스컴은 이모와 조카가 한 링크에서 연습하면서도 외면해야 하는 안타까운 모습에 조명을 비췄다.

함흥에서 월남한 김영희의 어머니 한계화씨는 "한필화가 북에 두고 온 동생이 틀림없다"며 삿포로까지 달려갔으나 관계를 부인하는 북한측의 제지로 만남을 이루지 못했다.

한계화씨는 북에 있는 아버지가 스케이트선수 출신이고 자신도 북에서 함남대표로 활약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후 한필화의 오빠라는 한필성씨가 등장, 전화통화를 통해 이들이 실제 남매간임이 확인됐다. 한필성씨도 즉각 삿포로로 날아 갔으나 당시의 남북관계로는 만남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 결국 둘은 19년간 애를 태우다 90년 3월 9일 한필화가 북한빙상경기협회 임원으로서 참가한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 극적인 상봉을 이루었다. 16세와 8세로 헤어진 후 40년이 흘러 56, 48세의 중년이 되어서 였다.

1991년 3월 11일-여자배구 슈퍼리그 첫 정상

여자배구 만년 4위 팀으로 불리던 호남정유가 90년 말 시작한 제8회 슈퍼리그의 챔피언에 오르면서 사상 초유의 9연패에 시동을 걸었다.

80년대 대농(미도파)-현대 양강시대를 깨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미 단신 장윤희(170㎝) 김호정(169㎝)과 국내 최장신 홍지연(187㎝)등 신인트리오가 첫 선을 보인 6회 대회에서 준우승의 돌풍을 일으켰던 호남정유는 이 해에 취약 포지션인 오른쪽에 박수정이 가세하면서 완벽한 팀워크를 구축, 우위에 있던 한일합섬과 미도파 현대를 차례로 꺾고 호남정유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특히 네트 상단과 거의 수평으로 날아가는 세터 이도희의 빠른 토스와 이를 받아 장신의 블로킹 벽을 뚫는 장윤희의 대포알 같은 스파이크는 환상적인 콤비를 연출했다. 타고난 탄력을 이용한 강타와 허를 찌르는 연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후위에 가면 그물 같은 수비를 펼치는 장윤희는 한국 여자배구 사상 최고의 선수였다. 87년 팀을 맡은 김철용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초인적인 투지의 밑바탕이 된 선수단 전원의 신앙심도 호남정유 신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중도에 팀 명칭을 LG정유로 바꾸면서 계속 승승장구하던 호남정유는 99년 9연패 후 11년 이상을 뛴 이도희 장윤희 홍지연 등 주전들이 한꺼번에 은퇴하고 드래프트제도 도입에 따른 우수신인 스카우트가 실패하면서 전력이 급전직하, 최하위까지 추락했으며 김철용감독도 2년전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퇴진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김 현 치

"예전에는 헝그리 복서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링에 올랐는데 이제는 복싱 붐이 죽어 큰 돈을 만지기 힘들게 됐습니다. 좋은 선수가 나타나면 미국에 데리고 가 인기를 올린 후 국내에서 타이틀 전을 여는 게 나은 방법이 되겠죠."

자신은 세계타이틀 획득에 실패했지만 5명의 후배를 왕좌에 올렸던 왕년의 명 지도자겸 프로모터 김현치(59)씨의 말이다.

그는 WBA의 '올해의 매니저', '올해의 프로모터'상을 돈 킹에 1년씩 앞서 88,89년에 받은 세계 복싱계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선수로서 75년 30세 때 딱 한번 가졌던 세계타이틀전을 놓친 것을 지금까지 아쉬워 한다.

"그 때의 판단착오가 두고두고 한이 됩니다. 9회에 3차례 다운 당하고 나서 '어떻게 지든 마찬가지니까 이판사판 KO작전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세컨드를 맡은 김기수(전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선배님이 점수가 앞서고 있어 판정으로 가면 이기니까 조심스럽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도 적지니까 KO가 아니면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결국에는 밀어붙이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만 15회를 다 흘려 보냈습니다."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고, 상대를 끌어 들이며 한 방 맞받아 치려고 로프에까지 뒷걸음 치다가 턱에 왼손 훅을 정통으로 맞은 게 치명적이었다고.

그는 세계챔피언은 못 됐어도 지도자로서, 매니저와 프로모터로서 더 할 수 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75년 은퇴 후 운영한 동아체육관에서는 하루에 200명 이상이 운동을 했다. 인원수가 절반을 따라 오는 체육관이 없었다. 아마추어대회를 하면 11체급의 절반 이상을 그의 체육관이 휩쓸었다.

"복싱은 곧게 뻗어 치는 것, 올려 치는 것, 꺾어 치는 것 3가지 뿐입니다. 그 중에서 꺾어 치는 훅이 본능적으로 가장 강한 힘이 가해지기 마련이고, 훅을 할 때는 스트레이트나 어퍼컷 때와 달리 머리가 돌리기 때문에 상대의 반격을 정면으로 맞을 위험이 적습니다." 그래서 김현치 사단의 복서들은 모두 상대가 들어올 때 맞받아 치는 라이트 훅이 주무기가 되었다.

유명우 박종팔 김환진 박찬영 서성인이 그의 밑에서 기초부터 배워 세계챔피언이 되었고 정상 한발 앞에서 물러난 김득구 황준석 최문진도 제자였다.

프로모터로서의 그의 활약은 불가사의했다. 그는 78년 국내선수들의 국제경기가 모두 외국인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시절에 프로모터를 시작했다.

"당시 유제두 홍수환 염동균 등이 모두 2∼3차례 방어밖에 못했어요. 대전을 모두 외국인의 손에 맡기다 보니 여러 가지 옵션에 묶이는 불리한 계약을 감수해야 하고 결국 챔피언을 해도 돈을 제대로 만져보지 못했지요. 롱런 여부는 프로모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비결은 '신용' 하나였다고 한다. "토머스(세례명)와 문제가 생기면 상대가 잘못한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히 약속을 지켰다고. 그 결과 박종팔-해글러의 WBA 미들급 타이틀전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 경기는 박종팔의 미국 내 인지도가 낮아 흥행이 안 된다며 위약금을 물겠다는 미국측 프로모터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대신 김득구-맨시니 전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93년 프로모터를 그만두었다. 복싱의 인기가 내리막인데다 우후죽순으로 생긴 프로모터들이 "그 만큼 돈 벌었으면 이제 푼돈은 넘기라고 하는데 사실 돈도 안 생기면서 싸움하기도 싫어 활동을 중단했다"고.

이후 미국을 오가며 조그만 사업들을 추진해 온 그는 "역시 복싱계를 떠나서는 할 일이 없다. 미국에는 함께 일하던 프로모터들이 건재하다"며 재기의 의사를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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