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인구나 멸망 후 유민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연구는 쑨찐지(孫進己)의 논문에서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1994년의 '동북민족사 연구'에 실린 '고구려 민족의 유향'에서 孫씨는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고구려 인구 69만 7,000호에는 다수의 비고구려인이 포함됐다고 해석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한족이 3분의 1'이라는 대목에 근거해 여기서 10여만 명의 말갈인을 빼면 실제 고구려인은 30여만 호 100여만 명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이후 자오푸시앙(趙福香)은 2000년 '고구려 멸족 후 민족유향'이라는 논문에서 멸망 당시 고구려 인구를 15만 호, 70여만 명으로 추산했다. 이 중 30여만 명이 중원 각지로 옮겨가고, 발해와 신라에 각각 10만 명씩 귀화했으므로 결국 고구려인의 대부분은 중국인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양바오룽(楊保隆)도 2001년 '고대 중국 고구려역사 총론'에 실은 '고구려국 멸망과 고구려인의 거향'에서 '구당서'의 69만 호에는 비고구려족이 다수 포함됐다며, '삼국유사'의 21만 508호라는 기록보다 6만 호가 적은 15여만 호(70만∼80만 명)로 추측했다. 퉁화(通化)사범대 고구려연구소 부소장 겅톄화(耿鐵華)도 '중국고구려사'(2002년)에서 고구려 멸망 전후의 인구를 17만2,000호에 86만여 명으로 계산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인들은 거의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어 대중화(大中華)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 7세기 인구 파악부터 잘못
고구려는 668년(보장왕 27년, 신라 문무왕 8년)에 김인문이 이끈 신라군과 이적(李勣), 설인귀(薛仁貴) 등이 지휘한 당군의 연합군에게 멸망했다.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는 427년에 서울을 국내성(지안·集安)에서 평양으로 옮겨 한반도 지배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천도는 북방을 향한 드넓은 야망을 끊는 계기가 됐다. 나라를 잃은 많은 고구려 사람들은 강제로 중국으로 끌려가 유랑민으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은 요동·요서 지방의 공한지에 분산 배치됐으며, 멀리 산시(山西)성, 쓰촨(四川)성, 간쑤(甘肅)성 등지에 끌려가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변방 민족(거란, 토번, 말갈, 돌궐족)을 막는 변방수비대에 편입됐다. 그밖에 신라로 귀화하거나 대조영을 따라 목단강 유역으로 가서 발해를 건국하는데 참여했고 또 일부는 일본(왜)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들은 나고 자란 만주 남부 압록강 북부와 한반도 북방에 그대로 살았다. 거기서 서서히 신라에 동화되거나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된 것이다.
중국의 주장은 우선 인구 파악에 큰 오류가 있다. 중국 역사서 등에 따르면 고구려 당시 통상 1호당 인구는 6∼8명이다. 예를 들어 '구당서'에는 쑤저우(蘇州) 인구가 7만6,000여 호에 63만 명, 항저우(杭州) 인구가 8만6,000호에 58만 명, 덩저우(登州) 인구가 2만여 호에 12만 명으로 나와 있다. 이대로 하면 고구려 인구도 15만 호일 때는 105만 명이 되고, 30만호일 때는 210만 명이 된다. 그렇다면 중국 학자들이 중원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고 주장하는 숫자보다 고구려 옛땅에 남아있는 인구가 훨씬 많아진다. 따라서 고구려인이 대부분 한족(漢族)에 동화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멸망 후 140만여명 잔류 추정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고구려는 70년간(598∼668년) 전쟁으로 전국이 황폐해졌으며, 당나라와의 싸움에서만 12만 명이 피살됐고 포로도 8만5,000명이 넘었다. 전쟁의 결과로 고구려와 요동·요서 일대는 호당 평균 인구가 3인 전후로 격감했다. '구당서'(지리지)에 따르면 요동의 인구는 5,718호에 1만8,156명(3.2명), 영주(營州)는 997호에 3,789명(3.8명), 요서는 611호에 1,896명(3.1명), 안동도호부는 5,718인에 1만8,156명(3.2명)이다. 1호당 평균인구가 3.3명이다.
그렇다면 15만 호일 경우 고구려 인구는 50만 명 전후(30만 호의 경우 100만 명)가 된다. 70년 전쟁 동안 피살(12만 명), 포로(8만5,000명), 강제이주(42만 명)된 수가 62만5,000명이라는 기록을 감안하고 여기에 발해, 신라 귀화인을 더하면 고구려인은 거의 없어지는 결과가 나온다.
고(故) 이옥(李玉) 파리7대학 명예교수는 1997년 '고구려 인구'라는 논문에서 고구려인의 숫자를 135만 명 전후로 추측하기도 했다. 여기서 멸망 후 70만 명 정도 인구가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65만 명은 고구려 옛땅에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 영토가 40만㎢임을 고려할 때 인구밀도가 1.6명(㎢)에 불과한 것이어서 사막이나 고산 지역 또는 남·북극 지방에나 가능한 수치이다.
여기서 '구당서'의 69만7,000호라는 숫자와 1호당 인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구당서'의 기록에 7세기 후반기 전란 등으로 고구려 인구가 호당 3.3명 전후였을 것이라는 추산을 적용하면 멸망 당시 고구려 인구는 230만 명 정도가 된다. 고구려 멸망 뒤 강제이주되거나, 포로 및 귀순자가 된 수에다 신라에 귀화한 인구까지 포함하면 대략 71만 명이다. 여기에 대조영을 따라간 인구를 10만여 명으로 보면 모두 80만여 명이 줄었을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멸망 당시 고구려인은 140만 명이 넘는 수가 옛땅에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신라에 흡수되고, 대부분이 발해인이 됐다. 따라서 고구려 옛땅에 20만 명 정도 남았다거나 고구려인 대부분이 중국에 동화됐다는 중국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특히 신라 북방에 살던 고구려인들은 만주 남부(압록강 이북)의 주민들과 함께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키거나 신라와 함께 대당 항쟁을 주도했다.
신라와 합세해 대당 투쟁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런 정황이 더욱 분명하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압록강 이북의 성 가운데 중국(당)에 항복한 곳은 목저성과 남소성 등 11곳뿐이다. 항복하지 않고 버틴 곳이 안시성, 요동성, 북부여성 등 11곳, 역시 항복하지 않았지만 성민이 도망한 곳이 적리성 등 7곳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안시성, 요동성 등 옛 고구려의 군사 요새는 당나라 군사에 정복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강력한 반당운동의 거점이 된 것이다. 고구려 유민의 거의가 중국에 흡수됐다면 만주에서 669년부터 680년까지 12년간 계속 반당 운동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들은 옛땅에서 조국을 되찾고 당군을 몰아내는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당은 이를 회유·억압하기 위해 보장왕, 고덕무(高德武·보장왕의 아들), 고보원(高寶元·보장왕의 손자), 고구수(高仇須) 등을 이곳의 도독 또는 도호로 파견했으며 이 지역을 기미주(羈 州)로 삼아 고구려 백성을 어루만질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왕을 포함해 고위층을 납치해간 당에 맞서고자 안승(安勝)은 4,000여 호의 주민을 이끌고 신라로 넘어와 대당 항쟁의 불씨를 피웠다. 그 결과 평양 일대의 고구려 백성들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북쪽으로 추방했다. 특히 670년에는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 부흥의 깃발을 들고 거병하여 당의 관리와 당에 협조하던 중인 법안(法安)을 죽였다. 이후 한성(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이르러 먼저 남하해 사야도(史冶島·인천시 덕적도 부근의 소야도)에 머물고 있는 안승을 모시고 '고구려국'을 세우고 신라군과 합세해 대당 항쟁을 주도했다.
당은 '고구려 유민의 이반(離叛)'이 두려워 강제 이주를 계속해야 했다. 고구려 유민과 신라가 합세하는 것도 적극 저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때 당은 토번, 돌궐, 토욕혼 등 북방민족의 위협으로 수도 방어에 한계를 맞고 있었던 터라 고구려 부흥운동 대책에 어려움이 컸다. 고덕무를 상징적인 고구려 계승자로 삼아 '소고구려국'을 요동에 세워 고구려 유민을 회유·억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 유장(遺將) 고연무(高延武)는 신라장군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옥골이란 곳에서 당군을 크게 무찔렀다. 전투의 주역은 요동지방에 머물던 고구려인이었다. 이에 당군은 고간(高侃)을 사령관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해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이 침략군은 평양까지 쳐들어왔으나 결국 퇴각하고 말았으며, 다음 해(672년)에 다시 대규모로 침입했으나 신라군의 도움을 받은 고구려인의 저항을 뚫지 못했다.
신 형 식 상명대 초빙교수 백산학회 회장
■고구려 유민 협력 덕 신라, 對唐전쟁 승리
671년(문무왕 11년)은 신라와 당이 전면 전쟁에 돌입한 해이다. 이 해에 장군 죽지(竹旨)가 이끈 신라군이 석성(石城·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서 당군 5,000여 명을 죽이는 대전과를 올리자 당은 설인귀를 통해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문무왕에게 보냈다.
특히 675년에는 매소성(買肖城·경기 연천군 청산면)에서 당의 20만 최정예 부대를 대파했다. 이때 당군 6,000여 명이 희생됐다.
이러한 전과는 전적으로 고구려 유민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대부분 옛땅에 머물면서 때로는 신라군과 협조하고, 때로는 단독으로 대당 항쟁에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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