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6> 구두 조창남
알림

[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6> 구두 조창남

입력
2004.03.17 00:00
0 0

4.19가 나던 해(1960년), 그는 충남 서천에서 서울에 올라왔다. 종로 3가 단성사 옆에 있는 외삼촌의 구두방에서 일하며 야간대학이라도 다닐 참이었다. 하지만 구두방 일은 일찍 끝나지 않았다. 외삼촌이 하는 양을 보니 기술을 익히면 돈도 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대학 가는 것을 접고 갑피(구두 가죽)에 풀칠하는 법부터 배웠다. 조창남(63·성림제화 대표)씨의 구두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지금 대기업의 간편화 구두를 제작하는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아침 9시면 출근해서 저녁 7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이다. 직원 12명이 일하는 아래층 공장에서는 본드 냄새가 매캐하고 가죽을 꿰매고 갈고 자르는 기계소리가 시끄럽다.반면 그는 그 한 층 위의 일곱 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혼자 구두를 만들고 있다. 대기업에서 선택할 견본품을 만드는 작업만은 여전히 그의 손에서 이뤄진다. "구두 한 켤레 한 켤레를 다 이렇게 만들면 이탈리아 구두보다 우리나라 사람 발에 편한 구두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기계가 만든 외제 명품은 알아줘도 사람 손으로 만든 국산 명품은 값을 비싸게 쳐주지 않으니 이렇게 만들어서 팔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씨의 구두를 만들었다. 70년 상공부가 창설한 세계우수상품 시작품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탄 것이 계기가 됐다. 박정희 정부는 해외 명품을 따라잡기 위해 장인들로 하여금 외국의 제품을 흡사하게 만들어보도록 하는 경연대회를 매년 열었다. 그 때 조씨는 이탈리아의 테스토니 구두를 그대로 본따서 만들어 1회와 2회에 연거퍼 최우수상을 탔다. 1929년 이탈리아의 수제화 장인인 아메데오 테스토니가 창립한 테스토니사 구두는 고급화이면서도 신발 바닥이 접히는 편안한 구조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키가 작으니 높게 해달라' '발 크기가 245mm인데 발이 작아보이니 250mm로 해달라' '가죽창을 하되 청와대 바닥이 미끄러우니 그 아래 얇은 고무를 대달라' 등을 주문했다. 육여사는 키는 컸지만 발은 235mm로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조씨는 이 대회 수상 덕분에 상공부로부터 편도 비행기표를 얻어 한 달동안 유럽견학을 했다. 일본을 거쳐 프랑스 이탈리아와 독일을 돌아봤다. "소재와 부품이 우리와는 월등하게 달랐다." 유럽여행은 장인으로서 충격이었지만 한국은 한국이었다. 장인들의 기술이 기계화의 시대에 자연스레 접목된 이탈리아와 달리 한국은 70년대를 고비로 수작업에 의존하던 구두방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기업형 양화점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조씨 역시 이 같은 기업형 양화점에서 수제화에서 기계화로 나아가는 과정에 일조를 하게 된다.

구두를 만들려면 우선 구두 모양의 기본틀을 만든다. 골 또는 라스트(last)라고 부르는 뼈대로, 앞이 뭉툭한 구두를 만들고 싶으면 뭉툭하게, 뾰족한 구두라면 뾰족하게 플라스틱을 찍어서 만든다.

이 골에 대고 구두모양을 그린 후 그것을 가죽에 옮겨 가죽을 재단한다(이렇게 재단한 가죽을 갑피라 부른다). 골에 대고 신발 바닥심(중창)을 대고 갑피를 붙인 후 다시 신발 밑창(창)과 굽을 달아 구두가 완성된다. 조씨가 만드는 구두는 디자인은 기본형인데 신이 발에 착 붙는다. 중창을 반만 붙이고 앞쪽은 스펀지를 달아 부드럽게 휘게 하는 테스토니 기법(일명 볼로냐 공법)을 아주 충실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방법은 발리화도 따라 한, 정평이 난 구두제작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구두 만들기를 배우려면 허드렛일부터 시작한다. 조씨도 심부름만 하다가 갑피에 풀칠을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일이 숙달되자 얇은 가죽을 안으로 접고 융천을 안에 대서 두께를 맞추는 접음질을 배웠다. 이어서 장인이 지시하는대로 갑피를 재봉하는 법을 배우고 창 붙이기를 익힌다.

가장 힘든 것이 갑피 재단(패턴 디자인)과 골 만들기이다. 골은 구두의 기본형을 결정짓고 갑피 재단은 구두의 디자인을 완성한다. 이 때문에 제화업계에서는 골 장인과 갑피 재단 장인을 업계의 쌍벽으로 쳐준다. 조씨는 굳이 나누자면 갑피 재단의 전문가. 그는 "굽을 높게 낮게, 가늘게 굵게, 창을 두껍게 얇게, 구두 앞선을 둥글게 각지게, 뒤를 막을지 틀지, 앞에 장식을 달지 말지, 단다면 금속일지 리본일지, 소재와 색깔은 어떻게 할지 등등을 모두 패턴 디자인에서 결정하므로 이것만 숙달하는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부분은 외국에서는 스타일리스트가 결정하는 몫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서는 그 같은 작업이 모두 장인의 몫이었다.

조씨는 63년 외삼촌이 다른 사업을 한다고 제화점을 접자 명동의 제화점 두 군데를 거쳐 65년 금강제화에 입사했다. 이곳 디자인 개발실에서 갑피 재단을 본격적으로 배운 그는 70년부터는 "어떤 구두든 패턴 디자인은 문제없다"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진짜 구두를 제대로 만든다 싶은 것은 88년 독립하면서부터이다. "그제서야 내가 모든 것을 하게 되니까 옛날 수제화를 만들던 감각이 살아났다"고 그는 말한다. 물론 그는 아직도 이탈리아 명품 구두를 보면 "우선은 소재가 좋지만 무언가 손맛이 다른 데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한국인은 발꼴이 외국인과는 다른데 그 쪽 구두가 더 대접받는 상황은 안타깝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디자인의 문제이다. 외국의 명품 디자인을 베끼는 일은 구두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제화업계는 대형화하고 있지만 장인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장인 혼자 만들던 구두방은 업체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고급화 시장을 주도하는 살롱화는 발에 불편한 패션구두로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이 때문에 조씨도 봄 시장을 겨냥해 외국 명품을 흉내내 달라는 주문을 받아놓고 있다. 장인들의 손재간을 명품으로 엮어낼 구두 제작 시스템은 한국에서는 언제나 자리잡을까.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 중단된 한국형 구두 연구

테스토니사는 200여명이 손으로 만드는 가죽 제품으로 2002년에만도 4,171만 유로(599억원 정도)의 매출액을 올렸다. 놀라운 명품의 효과.

우리나라도 80년대에 명품 구두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후속연구가 이어지지 않으면서 한국 제화기업은 제자리를 걷고 있다.

83년 대통령이던 전두환씨의 지시로 한국형 구두모델 연구가 시작됐다. 당시 전씨는 이순자씨와 아프리카 순방에 올랐는데 하필 명동의 고급 수제화를 신고간 이씨의 발뒤꿈치가 완전히 까진 것. 전씨는 '고급 구두를 신어도 이러니 서민들은 오죽하겠느냐'며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원(KIST) 전산개발실장이던 조맹섭(55·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원)씨가 책임을 맡아 한국인의 발모양에 대한 대대적인 연구가 이뤄졌다. 조씨는 버스를 개조해 발모양을 재는 기기를 실은 뒤 연구원 15명과 함께 전국을 석 달 동안 누비며 2만여명의 발 치수를 일일이 기록했다. 그 후에는 유럽 6개국을 보름동안 다니며 제화 선진국의 자료를 수집했다. 이 같은 자료를 토대로 당시 제화 3사이던 금강 에스콰이어 엘칸토에서 발에 편한 구두형 제작을 맡아 공동연구가 계속됐다. "오후 6시가 키스트 퇴근 시간인데 그 때부터 구두회사에 가서 밤 11시까지 토론하고 작업하는 일이 계속됐다"고 조씨는 당시를 회고한다.

이렇게 1년 반동안 노력한 끝에 나온 것이 '화형(靴型) 설계'. 우리나라 발모양의 평균을 밝혀내 구두꼴의 기본틀을 만드는 최초의 자료였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소비자의 발을 직접 보고 일일이 목형을 제작하거나 아니면 일본이나 이탈리아의 골을 베끼는 선에서 그쳤으나 장인들의 주먹구구를 과학화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직접 한국인의 발에 맞는 골 제작이 가능해졌다. 이 여세를 몰아 조씨는 부산에 한국신발피혁연구소가 창립되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제화의 KS 표준형은 탄생했으나 후속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구두는 표준형 뿐 아니라 디자인에 따른 다양한 골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 같은 작업이 지지부진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신발산업을 한단계 끌어올리려 하던 조씨는 "이렇게 하다간 나조차 밥 빌어먹겠다"는 절망감에 신발 연구를 접었다. 조씨는 87년 영국 록부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디지털 색상보정을 연구, 구두와 인연을 끊었다.

"당시 일본에도 그런 연구가 없었다며 니폰슈즈의 연구원이 놀라면서 도움도 많이 줬다. 우리는 예쁜 구두와 편한 구두가 동떨어져 있는데 이게 다 인체공학적인 연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연구와 개발을 계속해왔다면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적인 구두 명품을 만들고 있을 텐데 기초를 무시하니 여전히 남의 것만 베끼고 있다"고 조씨는 아쉬워했다.

국내서는 그나마 오산대 신발과학과가 2년제로 장인들을 키워내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