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계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기도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앞서 존재한 고조선 및 한반도 북방의 고대종족까지도 중국사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우선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의 기원을 중국의 태양숭배 신화인 탕곡신화와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명이(明夷)'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군신화도 중국신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기자동래설 근거, 고조선을 중국사로
특히 중국학계는 중화주의가 강하게 피력된 일부 후대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은·주 교체기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갔다는 이른바 '기자동래(箕子東來)' 설화에 근거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는 실재한 철학가, 정치가이며 그가 조선반도에 나라를 세우면서 중국 동북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이 나라는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 기자조선은 주(周)와 진(秦)을 황제의 나라로 섬긴 해외의 속국이고, 위만조선은 한(漢)의 속국이었다가 한 무제의 조선 공략으로 한의 변강 지역이 됐다고 본다. 기자조선이 있으므로 위만조선이 있고, 또 한의 4군이 되었으며 고구려사와 발해사로 연결되므로 기자조선이 바로 중국 동북사의 개시라고 천명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고대 동북지구 3대 종족을 숙신계(肅愼系) 예맥계(濊貊系) 동호계(東胡系)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3계통의 민족 기원과 성장, 발전, 귀속 등의 내용을 정리해 활동무대가 현재의 중국 영역이란 점, 중국과의 단편적인 접촉 등을 근거로 "동북고민족(東北古民族) 발전사는 중국역사 범주에 종속된다"는 것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학계의 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연결되는 역사계승 인식은 비학술적, 비역사적 연구 결과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연구가 "중국 동북 고민족의 발전 맥락을 어지럽히고 중화민족의 혈연 계통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신화 해석은 아전인수
중국이 주장하는 내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구체적 역사적 사실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사실과 연결지어 설명, 그 특수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이란 명칭이 중국의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중국의 태양숭배 신화인 탕곡부상십일신화(湯谷扶桑十日神話)에 근거한 것이다. '산해경'에는 '10개의 태양이 하나씩 동쪽 탕곡(湯谷)이란 계곡에서 목욕하고 부상(扶桑) 나무 위의 가지로 올라가 하늘로 여행을 떠나 서쪽편에 도착해 하루가 된다'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학계는 여기서 단순히 아침을 의미하는 한자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과 이 신화를 연결 짓는 식으로 논리를 비약하고 있다. 탕곡이라는 명칭은 '사기'에 나타나는데 중국의 동쪽인 현재의 산둥(山東)반도 일대 칭저우(靑州)지역에 대한 표현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조선과 전혀 연결지어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대개 초인간적인 조건에서 신성한 존재가 출현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중국신화의 상황이 단군신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전개된다는 일반론을 바탕으로 중국학계는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문화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곰숭배 신앙은 중국신화와는 소재나 신화구조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이는 중국문화와는 무관하게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일군 고아시아족의 곰숭배 신앙과 관련된 것임이 이미 우리 학계의 연구성과로 확인됐다.
기자동래설은 허구 가능성 커
중국학계는 중국의 동북지역 확장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기자동래를 들고 있다. 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왕이 되자 현인인 기자가 그를 섬길 수 없다며 조선으로 피난했다는 내용이다. 기원전 12세기께 일어났다는 이 일은 내용이 허구라는 사실이 한국 및 일본 학자에 의해 이미 확인된 상황이다.
이 내용을 전하는 '상서대전(尙書大典)' 등의 사료는 중국이 가장 우월한 민족이란 인식을 담은 대표적인 기록이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은 다른 역사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이 사료에만 기록되어 있다. 사료의 문제 때문에 기자의 실존까지 부정되는 형편에, 기자동래라는 가공의 상황을 통해 고조선에 중국문화가 이식되어 꽃피었다는 논리는 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가 한국에서 청동기문화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점인데다 이 청동기문화가 중국과는 계통과 성격이 다른 비파형 청동기와 지석묘(고인돌) 등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중국의 논리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동북은 중국사의 바깥 지역
중국학계는 동북고민족이란 용어를 사용해 고대 종족이 동북지역에서 하나의 동일 운명공동체로 유지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동북고민족'은 개념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동북'이란 표현은 현재 중국에서 '동북 방향에 위치한 지방'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지린(吉林)성, 랴오닝(遼寧)성의 동북 3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 중국의 행정구획에 의한 명칭일 뿐이지 하나의 동일 문화나 역사로 포괄해 설명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그런데 동북고민족이란 표현은 마치 이전부터 이곳에 하나의 동일문화권이나 정치적 통일체가 존재하여 이를 단일 개념으로 설정할 수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동북'은 우리가 인식하는 동북 개념과도 크게 다르다. 우리가 흔히 '동북아시아'라고 할 때 쓰는 동북 개념과는 기준과 범위가 다른 지극히 중국적인 명칭이다. 중국은 정치적 포섭과 영유권을 염두에 두고 쓰는 지역 개념 속에 계통과 문화가 다른 고대종족을 '고민족'이란 표현으로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정치 상황을 과거에 그대로 투영한 것으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인식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표현의 문제점은 전통 중국 사서에 동이(東夷), 북적(北狄) 등 외국인으로 파악된 존재를 이 개념 속에 뭉뚱그려 넣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해 분명히 외국사(外國史)로 기록됐던 존재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후 공간적으로도 중국사에서 완전히 제외된 지역을 이제 와서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갈석(碣石)은 현재의 산해관(山海關)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가장 확대된 연(燕) 시대의 경우도 현재의 요하 및 혼하 부근 요동지역 정도로 보고 있다. 이들 지역은 현재의 랴오닝성에 국한된 영역이며 헤이룽장, 지린 지역은 포함되지 않아 동북 지역의 극히 일부에 한정된 것이다.
한사군 변화 등 고조선―고구려 계승
위만조선의 정치적 신속을 강조하거나 한 군현의 존재를 부각하는 중국의 견해에도 문제가 많다. 위만의 종족 성격은 동이계임이 이미 확인되었다. 한과의 정치, 군사적 갈등 속에 설치된 한사군은 위만조선 내부의 정변에 따라 한과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가운데 3군이 20여 년 만에 폐지되거나 중국 내륙으로 이동한 것은 고구려 등 토착세력의 정치, 군사적 성장에 의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과 독자성을 방증하는 내용이다. 기자동래설 등에 근거한 중국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사상누각의 논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법종/ 우석대 사학과 교수
■고인돌등 청동기문화 차이 中학계선 침묵으로 일관
고조선의 청동기문화는 고고학적으로 중국과 확연히 구별된다. 지석묘(고인돌)와 비파형동검(사진) 문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고조선 문화의 이런 독자성과 중국 문화와의 차별성에 대해 중국학계는 침묵하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칼몸과 손잡이가 분리되는 조립식인데 반해 중국 청동검은 일체식이다. 칼의 성격도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의식용에 가깝고 청동 원료의 배합 방식도 중국과 다르다.
지석묘는 지상에 탁자 형태의 돌을 쌓아 제단 모습을 갖춘 무덤으로 중국의 지하매장 풍습과 완전히 다른 양식 및 사후세계관을 보여준다.
이 전통은 석관묘로 이어졌으며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 같은 고구려의 적석기단묘(돌무지무덤)로 계승되었다. 돌로 쌓아 사후 공간을 구성하는 우리 민족의 무덤 전통이 지석묘에서 고구려의 적석기단무덤으로 이어진 것이다.
중국학계에서는 지석묘를 석붕(石棚) 또는 대개석묘(大蓋石墓)라 부른다. 분포 범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 고조선의 영역으로 파악되는 랴오둥(遼東)반도를 경계로 중국 내륙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산둥(山東)반도와 그 동남해안에서 극히 일부가 보일 뿐이다.
이 공간은 동이족의 활동 무대와 연관되는 곳일 뿐 아니라, 랴오둥반도 남단에서 서북 방향으로 분포된 양상이 고구려의 천리장성 경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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