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명수 칼럼]"악녀"와 "영웅"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명수 칼럼]"악녀"와 "영웅"

입력
2004.05.10 00:00
0 0

린디 잉글랜드라는 21살의 미군 일병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매스컴은 그를 '악녀', 또는 '악의 화신'이라고 부르고 있다.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하는 몇 장의 사진이 공개됨으로써 '악녀'란 낙인이 찍혔다. 그는 사진 속에서 벌거벗은 포로들을 희롱하고, 포로의 목에 개처럼 줄을 매어 끌고 다니기도 했다.

그 사진들은 미국이 주장해 온 '숭고한 전쟁'과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분노와 메스꺼움을 느끼며 인간의 마성(魔性)에 몸서리치고 있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미네랄 카운티에서 철도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린디는 '훌륭한 학생'으로 고교를 졸업했고, 졸업 후 월마트에서 일할 때는 모범사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대학에 진학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기상학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린디는 이라크에서 기술부사관 찰스 그래너를 만나 약혼했고, 현재 임신 4개월이다. 그들 두 사람은 이라크 포로를 학대하며 함께 찍은 사진들이 세계에 유포됨으로써 유명한 '악인 커플'이 됐다.

부시 대통령은 "이 사건이 일반적인 미국인의 품성을 반영하는 사건이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린디는 특별히 악인의 기질을 타고 났을까. 평범한 시골여성이 전쟁의 광기와 증오에 휩쓸려 이성을 잃었던 건 아닐까.

미군의 이라크인 학대는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으며, 병사들 수준에서 그런 학대가 이루어 지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그 같은 성적 학대가 특수부대원들이 교육 받은 심문기법의 일부라는 한 퇴역장교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미국의 일부 전직 수사관들도 9·11테러 사태 이후 미군의 심문기법이 좀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으며,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행해진 것처럼 비인간적인 기법이 동원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린디는 희생자에 가깝다. 그는 운수 나쁘게 그 때 그 장소에 있다가 유탄을 맞았거나 폭격으로 죽은 전쟁 희생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린디가 교도소에 배치되지만 않았다면 그의 고향은 '자랑스런 이라크 참전용사'들의 사진 속에 그의 사진을 여전히 함께 걸어놓고 있을 것이다.

린디의 운명은 동갑내기인 제시카 린치와 비교된다. 린디와 같은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입대했던 제시카는 작년 3월 나시리아 전투에서 이라크 군에 잡혔다가 구출됐다. 이라크전의 '영웅'이 필요했던 미국은 제시카 린치를 영웅으로 띄웠다.

미국인들은 이라크전과 함께 두 여군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은 '영웅'으로, 또 한 사람은 '악녀'로 기억될 것이다.

린디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였다. 그는 왜 자신이 그렇게 되었는지 새겨볼 틈도 없이 바퀴에 깔렸다. 목에 줄을 맨 채 개처럼 끌려 다니던 벌거벗은 이라크인이 상처받고 파괴되었듯이 린디의 생도 처참하게 망가졌다. 기상학자를 꿈꾸던 21살 여자를 이제 그 누구도 1년 전으로 되돌려 줄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책임인가. 그가 악인이므로 자신의 악행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까. 병사들의 '마성'을 이용해 적을 고문케 하고 정보를 캐 내고자 했던 세력은 책임이 없을까. 국가는, 럼스펠드와 부시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부시는 럼스펠드 해임을 거부했다. 그는 옳지 않다. 고문당하고 모욕당한 이라크인들에게, '숭고한 전쟁'이라는 미국의 주장에 동의했던 우방들에게, 전쟁의 광기가 만들어 낸 린디라는 악녀로 상처 받은 미국인들에게, 그는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부시와 럼스펠드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럼스펠드 해임은 최소한의 조치다.

장명수/본사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