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내과에서 전화가 왔다. 만성 신부전으로 입원 중인 38세 여성 환자가 잠을 잘 못자고, 의사가 회진할 때도 고개를 푹 숙이고 묻는 말에 잘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이 환자는 1년 전 만성 신부전으로 진단 받은 후 일주일에 2차례 이상 한 번에 4시간 이상씩 혈액 투석 치료를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중학교 교사인 환자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다가 최근 증세가 악화돼 신장내과에 입원했다.
환자를 만나러 병실로 가자 환자는 어깨가 축 처진 채 앉아있었고 몇 번이나 말을 걸어야 겨우 대답했다. "아직 젊은데 이렇게 병원에 있으니 너무 우울해요. 학생도 돌보지 못하니 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죽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였다.
수 십년 전만 해도 의학계의 주요 관심 질환은 세균 등이 원인인 감염질환이었다. 하지만 의학 발전으로 감염질환이 많이 줄어 지금은 만성 신부전, 당뇨병, 고혈압, 암 등 만성 질환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런 만성 질환 문제는 환자의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회, 환경 등 인생 전반에 막대한 손실을 준다. 따라서 만성 질환자에겐 주위의 따뜻한 배려와 함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 심지어 의사조차 이런 면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울증이 환자의 치료의지와 몸의 면역체계를 떨어뜨려 만성 질환을 더 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다행히 이 환자는 적절한 항우울제 치료와 위기 관리 면담으로 우울증이 회복되었고 만성 신부전 증상도 호전돼 퇴원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만성 질환과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환자도 적잖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실제로 췌장암 환자 중 약 70%, 만성 신부전 환자의 약 40%가 우울증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따른 정신과 조치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울증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회복이 가능한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다양한 환자를 만나 보았다. 환자는 질병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 우울증에 시달리지만, 환자 자신이나 보호자는 병을 의지로 이겨야 한다며 의지가 약한 것을 탓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또한 다른 과 의사는 질병 이외에 환자의 마음이나 환경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막연히 두려워했다.
우울증은 의지가 약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사람이 걸리는 병도 아니다. 또 고혈압 환자가 항고혈압제로, 천식 환자가 천식약으로 치료하듯 우울증 환자도 항우울제와 정신요법으로 치료하는 것이다. 만성 질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보호자와 주치의가 잘 헤아려 적절한 시기에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환자도 정신과 진료를 막연히 거부하지 말고 만성 질환 치료와 함께 우울증 치료도 적극적으로 받아 빨리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박원명/가톨릭대 의대 성모병원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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