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유행했던 썰렁한 유머 한 토막. “내 동생이 어제 죽었어.” “왜?” “마당에서 놀다가 금 밟아서….” ‘금 밟아서 죽는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썰렁하지만 그런대로 유쾌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유머다. 그런데 요즘은 진짜로 금 밝으면 죽는다. 운전하다가 괜히 횡단보도 앞 정지선을 밟거나, 지나치면 범칙금 최고 6만원에 벌점이 무려 15점이니까.세상은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데 영화 속 풍경은 그다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11일 개봉한 공포영화 ‘페이스’. 사체의 두개골로 얼굴을 복원하는 복안(復顔)전문가가 등장하는 첨단 호러물을 지향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지향’했을 뿐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첨단을 달려도 귀신은 어김없이 흰 소복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다. 하기는 어둠이 내리는 차창 밖에서, 흰 소복을 입은 웬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뛰어갈 때만큼 무서운 것은 없으니까.
이 정도의 ‘구시대 유물’은 애교로 봐준다고 하자. 19일 개봉하는 피터 그리너웨이(62) 감독의 ‘차례로 익사시키기’. ‘스크린을 화폭 삼아 성(性)과 죽음을 전시하는 괴팍한 천재감독’이라는 평가를 받는 거장의 작품이다. 그런데 시사회에서 경악하고 말았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의 ‘그곳’이 둥그렇고 시커먼 원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인물이 움직이면 그 원도 헐레벌떡 ‘그곳’을 따라다녔다. “뚱뚱한 남자들은 이렇게 고추가 작니?”라는 재미있는 대사가 오가는 데도, 그 원은 달달 떨면서 그곳을 가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구시대 유물? 그것도 세련된 모자이크가 아닌, 투박하고 큼지막 하고 완전 불투명을 자랑하는 검은 원이라니…. 노골적인 성애장면조차 이제는 제한상영관에서 볼 수 있고, 웬만한 성애장면은 ‘15세관람가’ 영화에서도 넘쳐 나는 요즘 세상에 ‘크고 검은 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다. 가뜩이나 먹을 것 갖고 장난치는 그 못된 구시대 작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요즘에.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