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십년 전의 핵 과거사가 잇따라 드러나면서 정부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비밀리에 진행된 우라늄 농축실험이 적발된 직후, 플루토늄 추출 실험까지 새로 밝혀져 국제적으로 '핵신뢰도'를 유지하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정부 발표로 미뤄보면 이번 사건 역시 소수의 과학자들에 의한 호기심 차원의 실험이 부주의와 사후처리 미숙으로 의혹이 부풀려진 사례다. 5공화국 초기인 1982년 공릉동 연구용 원자로에서 2.5㎏의 5개 핀짜리 폐연료봉 한 다발을 조사(照射·irradiation)해 분석했다. 실험 목적 자체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없는 물질의 화학적 특성분석을 위한 것이었으며 폐연료봉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도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5㎏에 절대부족한 ㎎단위였다. 또 북한은 핵개발 의도가 분명한 재처리시설을 갖춰 국제적 지탄을 받고있지만, 우리 실험은 재처리와 상관없는 사소한 추출실험에 불과하다는 게 정부측 설명이다.
문제는 82년 당시 추출실험을 자진신고하지 않은 점이다. 1962년 가동을 시작한 이 원자로는 IAEA의 핵안전조치협정의 신고대상이었으며 정기적으로 사찰도 받아왔다. 그러나 추출실험은 신고되지 않았고, 15년 후인 97년 IAEA가 원자로 환경샘플링으로 추출 흔적을 발견해냈다.
과학자들의 실험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정부는 당시 IAEA측에 충분한 해명을 하지 못했고, 결국 2003년에 다시 확인요청을 받고서야 실험 사실을 보고했다. 정부는 연구책임자가 사망하고 자료가 충분히 남아있지 않아 1차 요청에 적절한 답변을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플루토늄 실험은 그러나 우리 정부의 핵투명성 확보에 상당한 지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감추려 했다는 모양새 때문에 온갖 추측들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일부 외신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핵개발 계획'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하등의 문제가 없는 과거의 실험'을 미국측 관리가 AP통신을 통해 누설한 것은 북핵회담에 지장을 주려는 미국의 의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 "한국 우라늄" 비난 배경
북한이 재외공관 외교관을 통해 한국 과학자들의 우라늄 분리실험을 잇따라 문제 삼고 나서면서 북핵 관련 4차 6자회담 개최와 남북관계 전망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국내 과학자들의 플루토늄 추출실험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파장은 확산될 조짐이다.
북한은 한국의 우라늄 분리실험을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핵개발 의혹을 회피하는 데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우선 "한국의 실험으로 핵군비 경쟁의 확대를 방지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 미국은 핵문제에 관한 이중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는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빈 주재 북한대사관 외교관들도 한 차석대사와 유사한 논리로 한국의 핵실험 책임론을 제기하는 동시에 미국의 태도를 지켜보겠다며 한미 양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들의 발언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이 향후 "우리도 안전을 위해 핵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북한은 과거 '핵 억지력 확보' 위협과 '평화적 핵 에너지 이용'이라는 강온전략을 병행해왔다. 한 차석대사의 발언은 이 두 가지 카드를 모두 노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국이 한국을 감쌀 경우 자신들도 한국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버틸 수 있고, 한국의 실험을 문제 삼아 자신들의 정당한 핵개발 논리를 펼 수 있는 것이다. 한미 양국은 이래저래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단 북한의 반응이 예상했던 수준이라며 6자회담 개최를 낙관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중국과 러시아도 4차 6자회담 개최를 희망하는 만큼 합의를 미루기가 (북한으로서도)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10일부터 예정된 중국 권력서열 8위 리창춘(李長春) 당 정치국 상무위원 방북도 4차 6자회담 개최에 낙관적인 근거가 된다. 그러나 북한이 몸값 올리기에 나선 만큼 회담이 열리더라도 북한 핵문제 해결전망은 밝지 않아 보이는 게 정부의 또다른 고민이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북한으로서는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6자회담 의제를 흐트러뜨리면서 불참 명분 하나도 추가한 셈"이라며 "6자회담 당사국들이 한국의 우라늄 실험을 문제 삼지 않아야 북한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한국이 2000년 우라늄 농축실험에 이어 1980년대 초 플루토늄 실험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들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번 사태가 6자회담 등에 미칠 영향에 주목했다.
■ 각국 반응/美 "매우 오래전 일"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8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모든 핵 활동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그 중 일부는 '매우 오래 전'이라는 것"이라면서 "한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국제사회가 알 수 있도록 핵 활동을 신고하고 IAEA에 협력하는 데 대해 이미 만족을 표시한 바 있다"고 일단 우리 정부의 해명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이 같은 태도가 미국의 속내를 그대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의심의 확인'과 북한·이란의 '이중 잣대론'제기 사이에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릴 킴벌 미 군비통제협회(ACA) 사무총장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70년대 핵 무기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기술을 습득하지는 못했다는 게 통념이지만 80년 대 실험은 한국의 핵 프로그램 폐쇄 조치가 완전한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중국과 일본의 반응도 자못 싸늘했다.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일본 관방장관은 "한국의 플루토늄 추출 실험을 핵무기 개발과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핵비확산조약(NPT)의 목적에 비춰 적절치 못한 것"이라며 "IAEA는 미량의 핵 물질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쿵취앤(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80년대 한국은 지금 우리 모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행동을 했다"면서 (이번 사태가) 6자회담을 파탄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관련국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dssong@hk.co.kr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南北 플루토늄 추출 뭐가 다른가
원자력연구소에서 플루토늄 추출실험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남과 북은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의혹을 동시에 받고있다. 연구용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점에서도 남북은 공통점이 있다.
남과 북의 핵 문제는 그러나 이런 공통점을 빼면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우선 플루토늄 핵에서 남측은 일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단위의 플루토늄을 극소량 추출한 일회성 실험에 불과하다. 반면 북측은 재처리시설로 보이는 축구경기장 크기의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지금까지 50톤 가량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10∼12㎏가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라늄 핵에서도 북측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원심분리방식을 활용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지만 남측의 과학자들은 대량생산에는 부적합한 레이저 분리방식을 활용했다.
남과 북의 핵의혹 차이점은 결국 추출이나 농축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남측은 단순 실험 차원에서 정부의 개입없이 이뤄진 것이고 북측은 정권 차원의 핵무기 개발의도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김정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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