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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IT계의 선구자 이용태<56> 500년 종가의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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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IT계의 선구자 이용태<56> 500년 종가의 종손

입력
2004.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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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2년 8월 18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느덧 고희를 두 해나 넘긴 나이가 됐다. 호적에는 이듬해 3월 3일 생으로 돼 있다. 당시에는 면사무소에 출생 신고하는 날이 생일로 둔갑하기 일쑤였다.내 고향은 행정 구역상 영덕군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영해부에 속해 우리는 스스로 영해 사람이라 부른다. 영덕은 현이고 영해는 그 보다 큰 도호부였던 터라 영해라는 이름에 더 긍지를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인량리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나라골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친숙하다. 뒷산이 학의 날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나래골이라 부르다 나라골로 변했다.

이 나라골은 뒷산을 파면 신라 토기가 나올 정도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산 곳이다. 이십대 이상 내려온 큰 종가들이 한 마을에 여덟 개나 모여 있는 특색 있는 동네다. 옛날에는 한 마을에 같은 성(姓)을 가진 일족이 모여 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 여덟 개의 종가가 있었다는 건 매우 색다른 경우라 할 만 하다. 우리집은 이 여덟 종가 중 하나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집 당호인 충효당(忠孝堂)을 따서 충효당 종가라고 불러왔다. 나는 이 충효당의 주인이고 재령(載寧) 이씨 영해파의 19대 종손이다.

영해파의 시조인 18대 할아버지는 당신의 삼촌이 영해부사로 계실 때 경남 함안에서 영해로 따라 왔다고 한다. 1494년 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가를 들어 정착, 영해파가 시작됐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무남독녀로 친정의 재산을 모두 물려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처음부터 넉넉한 형세로 출발했다. 97년 5월에는 영해 입향 500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집에는 고조모, 증조부, 조부모 그리고 부모님이 계셨다. 나까지 5대가 한 집에 살았다. 나는 할아버지 회갑 때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집으로 봐서는 아주 늦게 얻은 손자였다. 그 당시엔 환갑이면 증손자를 얻을 나이였다.

내 어린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하다.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특히 할아버지는 나를 조석으로 거느리며 정성껏 가르쳤다. 그 어른은 1955년에 돌아가셨지만 18세기식 사고방식을 끝까지 고집하셨다. 할아버지는 영남 대표로 일본 시찰단에 끼여 도쿄 등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돼 3년형을 언도 받았다. 한때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하와이로 망명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어른들이 말리는 바람에 단념하신 일도 있다.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내가 학교에 가는 걸 반대했다. 학교는 왜놈을 만드는 곳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대신 내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한문을 가르쳤다.

나는 입본(立本),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등을 공부했다. 그때의 공부 방법은 지금과 달랐다. 일어나자 마자 새로운 문장을 배웠는데 먼저 그 문장에 나오는 한자의 뜻과 음을 일일이 익혔다. 그리고 붙여 읽으면서 문장을 해석한 다음에는 큰소리로 스무 번 정도 외었다. 아침을 먹고는 붓글씨를 쓰고 또 배운 문장을 스무 번 정도 다시 큰소리로 읽었다. 저녁에도 똑 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처럼 나는 열살 때까지 한문 공부에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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