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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형기씨 별세/ 영원의 길 떠난 ‘뒷모습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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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형기씨 별세/ 영원의 길 떠난 ‘뒷모습의 시인’

입력
2005.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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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란 본질적으로 구축해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야. 시에 절대적 가치란 없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팔자를 타고 난 놈들이 시인이야. 그 무엇이건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유 말이야."

한 시도 한 곳에 머물기 거부했던 거역의 시혼으로 한국 현대시단의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 원로 시인 이형기(李炯基)씨가 2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1950년, 경남 진주농고 재학 중이던 열 일곱 살에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한 고인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63년 첫 시집 ‘적막강산’ 을 포함 ‘절벽’ 등 6권의 시집과 ‘감성의 논리’ 등 평론집 2권, 박목월 평전 ‘자하산 청노루’ 등을 냈다. 동양통신 등 몇몇 신문사 기자와 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부산산업대와 동국대에서 교수로 일했으며, 94년부터 2년 동안은 한국시인협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산문학상, 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고인의 문학은 청록파나 미당의 서정시를 통해 발아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하는 애송시 ‘낙화’는 그가 20대B 초에 써 첫 시집에 실은, 깊은 사색의 서정시다. 하지만 고인은 모더니즘적 시세계를 거쳐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지평으로 나아갔다. 고명수 시인의 말처럼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 허무를 통해 실존의 의미에 도달하는 여정일 것이다.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길’)

고인은 한 글에서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절망을 확인할 때만이 꿈은 꿈으로써 참답게 존재한다"고 했고, "허무의 세계에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란 절망을 확인하는 일 뿐"이라고도 했다. 소실점을 향해, 낭떠러지를 향해 홀로 나아가는‘누군가’는 겨울바다로 떨어지는 ‘그해 겨울의 눈’처럼 허망한 존재다.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고인은 1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부인 조은숙(68)씨의 대필로 창작을 계속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씨와 딸 여경씨, 사위 김태윤(한국와이어스 대리)씨.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102호, 발인은 4일 오전8시, 장례식은 오전9시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성당에서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다. 장지는 경기 송추 울대리 천주교 납골묘원.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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