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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1) 서강대 영문과교수 장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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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1) 서강대 영문과교수 장영희

입력
2005.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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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생각해보니 일생 공부를 하면서도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한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구태여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그에 대한 답은 간단명료하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신기할 정도로 무슨 특별한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재능이 없으면 어디엔가 특별한 관심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신은 늘 공평하다고 믿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일생을 신체장애를 갖고 기동력 없이 살게 되었으니 혹시 다른 특별한 재능을 주시지 않았을까 주도면밀하게 나의 ‘재능’ 찾기에 바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손끝이 무디어 무엇이든 만들기를 싫어했고, 어머니가 노래를 불러 줘도 무반응, 그림을 가르쳐도 무관심, 결국은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재능 찾기는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다섯 살 되던 어느 날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느새 한글을 깨치고 순정만화를 읽는 오빠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결정하셨다고 한다. ‘쟨 천상 공부 밖에는 할 게 없는 팔자’라고.

그래서 특별히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달리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어서 얼떨결에 공부하는 게 내 ‘팔자’가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공부하기에 적합한 머리를 갖고 있지는 않다. 소위 말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분석력 없이 있는 그대로 시각적으로 흡수해 사진적으로 외우는 기억력)’일 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 말을 빌리면 ‘냄비머리’여서 마치 양은냄비가 우르르 빨리 끓었다가 빨리 식듯이 벼락치기 공부하면서 기막히게 잘 외우고 그리고 시험만 끝나면 기막히게 잘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성적은 늘 잘 나왔다.

그렇게 대충 놀고 대충 공부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그 즈음부터 나는 공부란 내가 냄비머리로 벼락치기하며 그저 대충 여유부리며 해야 할 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나의 신체장애를 이유로 그 어느 학교도 내가 입학시험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체검사에서 떨어질 것을 구태여 시험을 볼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였다.

아버지가 이 학교 저 학교 찾아 다니시며 제발 입학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탄원 끝에 결국 체력장을 면제해 주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즉 당시 그 학교의 ‘커트라인’으로 보아 체력장에서 잃는 점수를 감안하면 학과 공부에서 만점을 받아야 하는 조건으로 서울 사대부중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때도, 그리고 대학교에 갈 때도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육체의 기능이 떨어지니 머리로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내가 남만큼, 아니 남보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공부로서 내가 이 세상에 발 붙여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이 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순전히 수작업에 연관된 것뿐이었다. 학교에 가지 못해 그냥 집에 있거나 아니면 내 무딘 손재주로 수를 놓거나 목공예나 시계수선 같은 일을 해서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내게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공부만이 나의 살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내 단 한 가지 재능까지도 원천봉쇄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제도와 싸워 이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그리고 이겼다.

이렇게 얘기하니 사뭇 전투적이고 비장하게 들리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싸움을 나름대로 즐긴 것 같다. 내가 공부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겠지만, 이 세상에 공부처럼 하기 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 무슨 일을 하든, 이 더운 여름에 땅을 파든 아니면 교통지옥을 뚫고 휴가를 가서 놀든,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책 읽는 만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육체적 노동을 극심히 싫어하고 소위 손가락 까딱하기도 귀찮아 할 정도로 게으른 내게 그러므로 나의 ‘공부할 팔자’는 기막힌 행운이다.

그래서 나는 19세기 미국문학의 석사, 박사 학위를 따서 교수가 되었고, 덕분에 나의 공부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이야기는 따로 있다.

얼마 전 문학관련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 중간에 화면 아래로 나의 경력이 자막으로 떴다. ‘장영희는 무슨 무슨 학교를 나오고 어떤 책을 쓰고... 등등.’ 그리고 나의 경력사항은 맨 마지막에 ‘현재 암 투병 중’이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아, 이제는 암이 나의 ‘경력’이 되었구나,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공부의 목적이 학습이고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암이라는 병 때문에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고 내 인생에서 최대의 ‘경력’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학교에 가는 일도 없고 무슨 학위증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병에 ???나서 나는 내가 몰랐던 사실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조금 더 의미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운다.

사람들은 암 환자라면 이미 생명의 의지를 잃어버린 희미한 눈에 바싹 마른 몸으로 조용히 누워 있는 사람을 상상하지만 1주일에 한번씩 내가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환자처럼 보이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살아있다는 증거로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인지, 또 아니면 그냥 생명에 대한 예의이든간에 (내 경우는 세 가지가 다 해당된다) 환자들은 가능한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병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은 여느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빛난다.

팔 등에 항암주사를 꽂고 병상이 열 두어 개 놓여있는 1일 입원실에 누워 있으면 돈 많은 부자나 대학교수나 정육점집 아줌마나 결국 생명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갖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마치 풍랑 속에서 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처럼 동지의식을 느낀다. 서로 싸온 음식을 나누고 아픈 할머니를 따라온 손녀를 함께 돌보고, 처음 본 사람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답하며 병실은 늘 떠들썩하다.

그곳에서 우리들의 화제는 이전에 일상적으로 관심 있던 것들_ 누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었는지, 누가 어떤 자리로 승진했는지, 정치권의 아무개는 왜 그런지, 누구 자식이 어느 대학을 갔는지, 등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다. 서로의 병세가 지금은 어떤지, 지난 번 CT 촬영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물론이고, 이전에는 너무나 가치 없고 사소하게 느껴지던 일, 예컨대 어디에서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어디에 가면 더 아름다운 산을 볼 수 있고,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지, 무슨 일을 하면 하루를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지, 어떤 책, 어떤 영화가 더 재미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한다.

무엇보다 우리들은 함께 오늘을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그러니 우리는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 교우들이다. 그리고 ‘공부’ 밖에는 잘 하지 못하는 나의 특유의 재능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전에 박사 학위를 받았듯이, 이번에도 나는 혼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원히 얻지 못했을, 삶에 있어 꼭 필요한 아름다운 경력을 쌓을 것이다. 전에는 나의 ‘냄비머리’로 배웠지만 지금은 가슴으로 절절히 배우면서....

어제 항암치료 받는 중에 읽은 책에는 어느 선사가 득도를 하고 읊었다는 게송이 실려 있었다. “오! 정녕 놀라운지고!/ 내가 장작을 패네./ 내가 샘물을 긷네...” 장작을 패고 샘물을 긷는 일은 그 선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었지만 득도를 하고 나서야 그 일의 소중함을,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맞다, 득도까지는 아니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아름다운’ 경력을 쌓고 있는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 말이다.

‘오, 정녕 놀라운지고. 내가 살아서 지금 글을 쓰고 있네. 내가 저 넓은 하늘을 보고 있네.... 정녕 놀라워라...’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는

한국 번역문학의 태두로 꼽히는 영문학자 고 장왕록(1924~1994)씨의 1남5녀중 셋째로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부모님의 극진하고도 올바른 진로지도로 장애는 그저 불편한 것일 뿐 남다를 것이 없다는 자세로 평생을 살아왔다. 서강대 영문과를 거쳐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85년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명작을 국내에 소개하고 한국의 명작을 외국에 소개하는 번역가로서 활동해왔으며 유려한 문체로 삶의 갈피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수필가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척추암이 도져서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더 깊은 공부에 돌입했다는 그의 학교 연구실에는 강단에 복귀한 스승을 환영하는, 갖가지 모양의 오색 종이테이프가 반짝이고 있다.

나는 매일 공부한다. 무엇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즐거울 수 있는지, 어디 산이 아름답고 어디 공기가 더 깨끗한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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