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호주에 갔을 때 동양학 중 한국학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가슴 아팠지요. 이후 한국의 고전문학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포부를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달팽이 걸음처럼, 노천에 켜놓은 촛불처럼 느리고 위태위태한 작업이었지요. 호주에서 한국학을 가르친 것이나 한문으로 된 ‘허난설헌(許蘭雪軒ㆍ1563~1589) 시집’을 영어로 번역한 것 모두 큰 바닷물에 물 한 방울 보탠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진형준)이 격년으로 시상하는 제7회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한 최양희(73) 전 호주국립대 아시아ㆍ태평양학과 교수는 깐깐하고 열정이 넘치는 노학자였다. 영역본 ‘Vision of Phoenix’(불사조가 사는 신선의 나라)는 2003년 미국 코넬대 출판부에서 나왔다.
심사를 맡은 김성곤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6일 “16세기에 벌써 중국과 일본에 그렇게 잘 알려진 훌륭한 한국 여성 시인이 있었다는 점을 외국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됐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성과”라며 “한문과 영문 대역으로 구성된 이 역서는 역자의 한문 실력에 기초해 영어로 옮기면서 시어들의 뉘앙스를 매우 잘 살렸다”고 평가했다. 최씨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난설헌의 생애와 한시 구조까지 풍부한 설명을 곁들였다.
숙명여고와 중앙대 영문과를 나온 그가 호주국립대로부터 사서직으로 초청받은 것은 1965년. 이후 한국 고전문학 석ㆍ박사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과 중국 고전 2,000여 권을 모았고, 중국어 강좌 시간에 한국어를 함께 강의하는 방법으로 ‘한국 알리기’에 몰두했다.
85년에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영역(‘Memoirs of a Korean Queen’ㆍ영국 런던 키간폴인터내셔널 출판사 발행)해 3판까지 찍는 호평을 받았다.
최씨가 여성 작가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당대의 남성들보다 뛰어난 여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난설헌은 옹졸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작품을 통해 사회 분위기를 뚫고 가려는 의식을 표현했습니다. 자녀 둘이 다 죽고 시어머니와 사이도 안 좋았지요.
남편은 바람을 피워 애를 태웠고, 결국 27세에 요절했습니다. 이번 번역서는 해외의 한국학자들이 한시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난설헌의 작품에 스며 있는 도교 사상. 4년이 걸린 작업 탓에 눈도 침침해지고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외국에서 하루 20시간씩 고서와 싸우는 외롭고 힘겨운 작업이었다. 가끔 영국 출신 변호사 남편 레이몬드 월(77)씨로부터 “서양 사람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코멘트도 받았다.
최씨는 유명한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최재서(1908~1964)의 4남 2녀 중 차녀. 그는 아버지가 지난 8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 사전 명단에 문학계의 친일파로 오른 데 대해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고생하신 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최씨는 지금은 정년퇴임해 번역에만 몰두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정리하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각종 연구 노트를 정리하려 합니다. 일단 8일 시드니로 돌아가서 2~3개월 푹 쉰 뒤 다른 고전 번역에 들어가야지요. 일부를 시작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시상식은 7일 오후 6시30분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글 박석원기자 spark@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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