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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1>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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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1>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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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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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수요일마다 독자를 찾을 ‘말들의 풍경’은 지난 한 해 동안 본보에 연재된 ‘시인공화국 풍경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 ‘시인공화국 풍경들’이 언어의 풍경 가운데 한국 현대시의 풍경만을 들여다본 데 비해, ‘말들의 풍경’은 그 살핌의 대상을 언어 전반으로 넓힐 것이다.

앞서 엿본 시(詩)의 말까지 포함해, 말들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앞으로 독자들이 살필 풍경은 바로 이 물음에 거칠게나마 답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새 연재물의 관심사는 언어의 생태학이랄 수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을 언어라는 기호체계 일반에 균질적으로 쏟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관심은 근본적으로 (인공언어가 아니라) 자연언어로 쏠릴 것이고, 또 이 연재물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쏠릴 것이다. 인공언어는 자연언어와의 비교 맥락에서만, 그리고 자연언어 가운데 외국어들은 한국어와의 비교 맥락에서만 눈길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필 풍경은 대체로 한국어의 풍경이 될 것이다.

자연언어들이 으레 그렇듯, 한국어의 풍경도 다채롭고 입체적이다. 다시 말해 한국어는 그 내부가 동질적인 기호 체계가 아니다. 한국어는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출신지역이나 세대, 교육적 직업적 배경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미세하게 살피면, 출신 지역이나 세대나 교육적 직업적 배경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도 한국어를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말씨를 자잘하게 갈라나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개인어(idiolect)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것은 수천만 개인어들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그 수천만 개인어들을 한국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근거는 의사소통 가능성이다.

한 화자와 또 다른 화자가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을 때,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동일한 언어는 균질적이지 않다. 화자의 정체성과 발화의 맥락을 반영하는 크고 작은 이물질(異物質)들이 그 언어의 내부를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 자연언어들이 으레 그렇듯, 한국어도 수많은 변이체(變異體)들의 뭉치인 것이다.

한 쪽 끝에 (예컨대 한국어라는) 언어(language)가 있고 다른 쪽 끝에 개인어가 있다면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방언들(dialects)이다. 방언은, 좁은 의미로 쓰일 땐, 지리적 방언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지역에 따라 분화한 언어 변이체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캐고 드는 분야가 언어지리학 또는 지리언어학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넓은 의미로 쓰일 때, 사회적 방언까지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나이나 직업이나 교육 배경이나 성별 같은 사회적 조건들에 따른 언어변이체들까지를 포함한다.

예컨대 과학자나 법률가들이 쓰는 전문용어, 범죄조직 내부에서 통용되는 은어, 허물없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속어, 인터넷 공간에서 어지럽게 춤추는 이른바 통신언어,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대체로 어색하게 들리는) 한국어 따위가 한국어의 사회 방언들이다. 이런 사회 방언을 파고드는 분야가 사회언어학과 언어사회학이다.

지리적 방언이나 사회 방언만이 방언의 전부는 아니다. 방언은, 더욱 넓게 해석하면, 한 언어 내부의 변이체들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어의 문어와 구어,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 무대의 언어와 객석의 언어, 선동가의 광장 언어와 연인들의 밀실 언어, 방송 언어와 신문 언어 따위는 서로 일정하게 구별되면서 한국어의 방언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여러 수준과 기울기의 방언들은 문체론이나 화용론 같은 분과학문의 일감이 된다. ‘말들의 풍경’은 이렇게 다채로운 방언들로 이뤄진 한국어의 켜를 하나하나 들추어보려 한다.

나는 앞에서 한 화자와 또 다른 화자가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을 때라야 그들은 동일한 언어를 쓰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언어학 차원의 판단일 뿐이다. 정치가 개입하면, 이 원칙은 쉽게 훼손된다. 제주 토박이와 서울 토박이가 그들의 고향말로 의사를 소통하는 것은 퍽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한 언어의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의 긴 세월 동안 이들이 동일한 정치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이 이런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반면에 코펜하겐 토박이와 오슬로 토박이와 스톡홀름 토박이는 앞서 예로 든 동아시아인들보다 한결 더 쉽게 자기들끼리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문법체계와 어휘목록이 서로 거의 일치하고, 음운 수준에서만 자지레한 차이를 보인다. 사실, 순수하게 언어학적으로만 뜯어보면, 노르웨이어란 덴마크어의 한 방언과 스웨덴어의 한 방언을 아울러 이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깊은 생각 없이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를 별개 언어로 간주한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분리 역시, 이들 북유럽인들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라는) 서로 다른 정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과 깊게 관련돼 있다. 만약에 역사의 우연이 제주도의 분리주의를 부추겨 그 섬에 별개의 정치공동체가 세워졌다면, 우리는 지금의 제주도말을 한국어와 다른 별개 언어로 분류했을지 모른다.

정치가 직접 참견할 때만이 아니라 시간축(時間軸)이 끼어들 때도 이와 비슷한 난점이 생긴다. 의사소통 가능성이 어떤 자연언어의 경계를 획정하는 기준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소쉬르(1857~1913) 이후 언어학의 몸통 노릇을 하고 있는 이른바 공시(共時)언어학 안에서 뿐이다. 지난 500년 남짓 한국어는 어휘목록을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문법 규칙들을 새로 보탰다.

게다가 15세기 한국어는 지금 한국어와 달리 성조(聲調)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인과 지금의 한국인이 자신들의 모어(母語)로 의사를 소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15세기 한양 사람들이 쓰던 언어와 지금의 서울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똑같이 한국어라 부르고 있다.

비록 저쪽을 중세한국어라 일컫고 이쪽을 현대한국어라 일컫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에도 눈길을 건넬 터인데, 이런 관행에도 근본적으로는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말들의 풍경’은, 소통가능성이 있든 없든, 한국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모든 말들의 풍경을 살필 것이다.

연재의 첫 자리에서 독자들과 함께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있다. 바로 이 연재물의 제목을 처음 발설한 문학비평가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김현(1942~1990)이다. ‘말들의 풍경’은 그가 돌아간 해 세밑에 나온 유고평론집의 표제다. 김현은 문학이 다른 무엇에 앞서 언어의 예술이라는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말들의 풍경을 탐색하는 데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말들의 풍경을 탐색하는 그의 말들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이루고 있다. 김현이 문학제도 안에서 활동한 시기는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스물여덟 해다.

그의 소박한 독자로서, 김현이라는 이름을 뺀 그 시기의 한국문학을, 아니 그 시기의 한국어 문장을, 말들의 풍경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니라 비평가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김현은 한국문학사에 사뭇 드물었던 말의 진경을 빚어놓았다.

오늘 시작하는 ‘말들의 풍경’은 김현의 유고평론집과 달리 문학언어를 집중적 대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 연재물은, 김현의 ‘말들의 풍경’처럼, 말에 관한 말들이다. 김현이 자주 내비쳤듯 말들의 풍경이 결국 욕망의 풍경이라면, 이 연재물은 욕망의 풍경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풍경을 그리는 내 말들 역시 또 다른 욕망의 풍경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서, ‘말들의 풍경’은 말들의 말이자 욕망들의 욕망이자 풍경들의 풍경이 될 것이다.

무단으로 제목을 훔쳐온 데 대한 찜찜함을 추스르며, 오랜만에 고인의 ‘말들의 풍경’을 펼쳐보았다. 이 평론집에 묶인 글들을 쓸 때, 고인은 내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 언어는, 절망스러워라, 내가 한 생애를 더 산 뒤에도 다다를 수 없을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무르익어 있다. 김현이 살아있었을 때,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내 오롯한 즐거움이었다.

그가 산 생애만큼을 거의 살고 보니, 이젠 그 즐거움 저 밑바닥에서 질투의 쓰림과 쓴맛이 배어 나온다. 그가 지금 60대의 선배 글쟁이라면, 내게 이따위 질투심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내겐 이것만해도 그가 더 오래 살았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이것은 물론 그가 너무 일찍 가버린 것에 속이 상한 독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투정에는 고인을 향한 응석이 깔려있다. 사실 질투라는 말 자체가 가당찮다. 내 어쭙잖은 글쓰기의 8할 이상은 김현의 그늘 아래 이뤄져 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말들의 풍경’이라는 제목을 슬쩍 훔쳐온 것을 고인도 눈감아줄 것이다. 선생님, 제목 훔쳐갑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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