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A씨(32)는 최근 말 못할 고민이 생겼다.
성기 주위에 물집이 생기고, 찌릿찌릿한 통증과 견디기 힘든 가려움증이 느껴졌다. 점심 때 시간을 내 일부러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비뇨기과를 찾았다. 헤르페스(HSV) 성병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왔다. 일주일전 회식 후 술김에 2차까지 간 생각이 번쩍 들었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진료한 의사에게 “콘돔을 사용했는데도 이런 일이 생기냐”고 물었더니, “콘돔을 써도 HSV 예방률은 60%에 불과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또 “증상만 완화될 뿐 HSV는 평생 당신 몸에 잠복, 배우자에 전염될 가능성이 높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성병이 콘돔을 넘어서고 있다. 콘돔으로도 완전 차단이 어려운 바이러스성 성병이 급속히 번지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국회 보건복지위 한나라당 고경화 의원에게 제출한 ‘2001년 이후 우리나라 성병 발생 추이’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남성들에게 발생한 성병 중 바이러스성의 비중이 5배나 높아졌다.
정부는 임질, 매독, 연성하감, 클라미디아 감염증, 비임균성 요도염, 성기 단순포진(HSV), 첨규콘딜롬(성기 주변에 사마귀를 일으키는 HPV의 일종) 등 7가지 성병을 3종 전염병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HSV와 HPV는 바이러스성이고 나머지는 세균성 성병이다.
보건소와 병ㆍ의원 등 전국 500여개 의료기관이 2001년 질병관리본부에 ‘남성에게서 발병한 성병’으로 보고한 건수는 총 2만3,284건이었으며, 이 중 바이러스성은 2.62%(610건)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세균성 질병인 임질이 61.5%(1만4,338건)로 가장 많았다. 임질은 콘돔으로 거의 완벽하게 예방되고, 완치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난해엔 성병 분포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체 성병 보고건수(9,368건)는 2001년의 4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HSV와 HPV 발병건수는 1,138건으로 두 배가 됐다. 전체 성병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4년 전의 5배인 12.14%를 기록했다.
세균성 성병의 급감과 바이러스성 성병의 급증이 동시에 맞물려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의 원인은 뭘까. 전문가들은 콘돔을 주목한다.
서울의료원 최범 산부인과 과장은 “크기가 1~2마이크로미터(㎛ㆍ100만분의 1미터)인 세균성 성병은 콘돔 사용이 늘면서 빈도가 현격히 줄고 있지만, 50~100나노미터(㎚ㆍ10억분의 1미터) 수준의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성병은 예방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진단했다. 분당차병원 이찬 교수도 “HPV와 HSV의 콘돔 예방률은 통계상 60~70% 정도”라고 말했다.
바이러스성 성병의 원천은 성매매 여성으로 추정된다.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콘돔 사용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젊은 남녀의 부담 없는 성관계가 늘었는데도 세균성 성병은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성매매 여성의 바이러스성 성병 감염률이 일반 여성의 3배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역학적으로 ‘감염 고(高)위험군’으로 불리는 성매매 여성의 HSV 감염확률은 77%, HPV 감염률은 47%로, 일반 여성의 3배에 육박한다.
심각한 것은 2004년 성매매특별법(9ㆍ23조치) 시행 이후 성병 고위험군인 성매매 여성이 보건당국의 통제권을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는 질병관리본부의 성병발생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남성의 바이러스성 성병 감염건수가 4년간 두 배나 늘었으나, 여성은 오히려 78%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2004년과 2005년의 크게 엇갈리는 남녀별 감염 추이는 당국의 감시체계에서 벗어난 성매매 여성들이 남성 고객들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과거 집창촌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보건검사를 받아야 성매매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국가에서 성병관리를 하는 것 자체가 성매매특별법과 충돌하기 때문에 전처럼 강제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
특히 9ㆍ23조치 이후 성매매 여성과 업주들에게 보건소는 기피 대상이다. 보건소를 찾는다는 것은 곧 성매매를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성매매 업자와 여성들의 모임인 한터 전국연합회 강현준 대표는 “경찰이 보건소의 진료기록을 근거로 성매매 업주들을 처벌하면서 업주들이 윤락여성들에게 아프면 개인병원을 찾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소별 검진 현황을 종합하는 질병관리본부의 성병발병 통계에서 2004년 이후 여성들의 발병건수가 크게 떨어진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현실에선 성병 확산 위험이 높아졌는데 통계 수치만 낮아진 것이다.
최근 남서울대 이주열(보건행정학) 교수가 성매매 집결지 여성 999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는 당국의 통계를 벗어난 성병 확산의 위험 징후가 뚜렷이 감지된다. 성병 검사 방법을 묻는 질문에 성매매 여성의 44.94%가 “아플 때 병원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정기적으로 보건소를 찾는다는 응답은 27.83%에 그쳤다. 또 성병 감염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매우 그렇다”(30.1%), “약간 그렇다”(35.4%), “그저 그렇다”(14.5%) 순으로 응답했다.
더욱 큰 문제는 집결지를 떠나 룸살롱, 안마시술소, 이발소 등으로 흘러간 성매매 여성들이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9ㆍ23조치 이후 집창촌의 성매매 여성들은 52.3%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성매매를 포기한 경우는 극소수이고 대부분 음성적 성매매를 하고 있을 것이란 게 경찰의 추정이다. 이 경우 관리는 고사하고 성병 감염 여부 등도 포착 되지 않는다. 이주열 교수는 “9ㆍ23조치 이후 성매매 음성화로 성병 확산이 우려되지만 당국은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고재학(팀장)ㆍ조철환ㆍ이동훈ㆍ박원기 기자 news@hk.co.kr
■ 콘돔 '통과'하는 바이러스
성병에 걸리지 않는 안전한 성생활은 과연 가능할까?
보건당국이 권하는 가장 일반적인 성병 예방법은 콘돔 착용이다. 하지만 콘돔이 매독 임질 등 세균성 성병은 차단해도, 유두종(HPV)이나 헤르페스(HSV) 등 바이러스성 성병은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유니더스 등 국내 콘돔 제조업체들은 “콘돔을 제대로 사용하면 모든 성병을 100%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뇨기과나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콘돔이 감염 확률을 낮출 수는 있으나 완벽하게 막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특히 인위적 피임을 반대하는 천주교는 콘돔 구조상 에이즈나 HPV 등의 바이러스가 표면을 뚫고 들어간다며 성병 차단 효과가 별로 없다는 입장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의료관계자는 “흔히 사용되는 라텍스 콘돔의 표면에는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5마이크로 인치(마이크로 인치는 1인치(2.54㎝)의 100만분의 1 길이)의 미세한 구멍이 있는데, 지름이 50 마이크로 인치 내외인 정자와 세균은 차단하지만 바이러스(평균 0.1 마이크로 인치)는 통과시킨다”고 지적했다. 1992년 미 식품의약청(FDA) 실험 결과, 사용된 콘돔의 3분의 1에서 에이즈 바이러스 크기의 물질들이 콘돔 표면을 통과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콘돔으로 차단될 수 있는 정자가 무게 5톤의 코끼리라면, 성병 바이러스는 파리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개방 풍조로 구강성교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콘돔을 사용해도 세균성 성병을 막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매독 증상은 원래 성기에 부스럼을 일으키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최근엔 입술이나 혀 등에서도 발견된다.
포경수술이 성병 감염을 낮출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더 뜨겁다. 포경수술을 장려하는 측에서는 스페인의 임상시험 결과를 예로 들며, 여성이 포경수술을 한 남자와 섹스를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궁경부암에 걸릴 확률이 다섯 배나 낮아진다고 주장한다. 포경을 하면 그만큼 남성의 성기가 청결해져 자궁경부암의 원인인 HPV에 감염될 위험이 떨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포경과 자궁암과는 관련성이 없으며, 오히려 자궁암의 위험을 높일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우리나라 남성의 90%가 포경수술을 받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포경수술 비율이 높은데도, 한국 여성이 자궁경부암에 자주 걸리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포경보다는 남성들의 문란한 성문화가 더욱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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