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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도로표지판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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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도로표지판 너무 많아요"

입력
2006.06.2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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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느끼면서 운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운전자들을 배신하기 일쑤인 도로표지판 때문에 길을 외우고 다녀야 할 지경이야.”

택시 운전경력 36년의 손복환(61)씨는 그래서 핸들 한가운데 메모지와 볼펜을 끼고 달린다. 운전자를 기만하는 안내판과 표지판을 기록하고,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느낀 점들을 수시로 메모한다. 손씨 스스로 엉터리 교통체계에 화가 나 1979년 시작한 메모는 이제 A4 용지 500장 가량의 묶음을 25개나 채웠다.

손씨는 최근 이 메모를 바탕으로 ‘신뢰를 잃은 표지판’ ‘횡단보도의 장애물’ ‘표지판을 가린 신호등’ 등 80여 항목으로 된 건의서를 만들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냈다. 128장의 사진과 표, 그림을 곁들여 문제점을 지적한 100쪽 분량의 이 건의서는 웬만한 논문을 뺨치는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손씨가 정성 들여 만든 건의서를 관계기관에 보낸 게 80년 이후 이번까지 벌써 20번이나 된다.

●허다한 표지판 오류

“서울서 30년 넘게 택시운전을 한 내가 헷갈릴 정도면 다른 운전자들은 오죽하겠어?. 사고나기 십상이지.”

손씨와 함께 건의서에서 지적한 서울 시내 몇 곳을 둘러봤다. 우선 지하철 2호선 교대역과 강남역 사이의 서초1교(경부고속도로). 4월에 손씨가 촬영한 사진을 보고 찾아갔지만 아직까지 2.5㎙라고 적힌 높이제한 예고 표지판과 3.5㎙로 적힌 본 표지판은 서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사진 참조)

“이게 신뢰를 잃은 표지판이 아니고 뭐야. 도대체 어떤 걸 믿으란 말인지….” 그래도 예고 표지판 제한높이가 더 낮은 것은 애교다. “저런 건 귀엽게라도 봐줄 수 있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큰일 나.” 만일 예고 표지판을 믿고 운전을 하다가 터널 같은 시설물의 통과높이가 갑자기 낮아지면 꼼짝 없이 시설물에 충돌하거나 급정거로 추돌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손씨는 실제 이런 이유로 사고가 난 곳도 있다며 중랑구 상봉동으로 핸들을 돌렸다. 4.3㎙높이의 상봉동지하차도. “얼마 전까지 내부 공사 때문에 천장이 내려와 3.7㎙ 이하만 통과할 수 있었어. 그런데 공사를 하면서 터널 바로 앞에만 3.7㎙ 표지판으로 고쳐 세우고 100미터 앞에 있는 표지판은 그대로 놔둔 거야.” 지금이야 공사가 끝나 다시 4.3㎙ 터널로 돌아왔지만 터널 안에는 4.3㎙의 예고 표지판을 믿고 진입했다가 터널 안에서 낭패를 당한 차량들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어 찾은 곳은 퇴계로 남대문 시장 앞. 엄연한 횡단보도 앞에 ‘횡단금지’ 표지판이 서 있다.(사진 참조) “예전에 없던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함께 철거됐어야 하는 표지판인데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지.”

이 밖에도 건의서에는 가로수 우체통 공중전화 전신주 신호주 신호기함 등 각종 장애물로 막힌 동대문구 제기시장 앞 횡단보도, 중구 신당동 중앙시장 횡단 보도 등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각종 교통체계를 지적하고 있다.

같은 도로를 두고도 관련 부서간 협조가 안돼 혼란이 생기기도 한다. 손씨는 “신호등이 안내판 바로 앞에 설치돼 안내판을 가리는 일, 이정표와 다른 정보를 주고 있는 노면 표시, 목적지를 안내하다 말고 중간에 슬그머니 사라지는 이정표 등 잘못된 곳을 말로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라고 했다.

●350만㎞ 달리며 기록

“아내가 제일 말이 많았지. 운전이나 더 하지 돈 안 되는 일에 왜 그렇게 매달리냐고.” 손씨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같은 장소를 최소 3번 이상 답사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도로를 찍어야 하는 만큼 차가 덜 다니는 일요일, 공휴일을 택해야 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사진 인화를 위해 사진관을 들락거렸다. “돈은 돈대로, 휴일은 휴일대로 이 일에 쏟아 부었으니 솔직히 난 할 말 없지 뭐. 그래도 사진 잘 찍으라고 마누라가 그 동안 카메라를 4대나 바꿔줬어. 잘 이해가 안가지?.”

손씨는 피아트를 시작으로 브리샤 콩코드 등 지금껏 7대의 차를 바꾸며 무려 350만㎞를 달렸다. “고치고 고쳐도 개선해야 할 곳이 계속 생기는 게 안타깝지. 앞으로도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택시를 몰고 건의서도 계속 낼 거야.”

건의서를 접수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유장석(46) 조사관은 “잘못된 도로 표지판이 주변에 수년 째 널려 있지만 적당주의가 만연돼 문제점들이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며 “손씨의 건의서를 진지하게 검토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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