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4> '한글소설'이라는 허깨비
알림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4> '한글소설'이라는 허깨비

입력
2007.01.02 23:44
0 0

최초의 한글소설은 뭘까?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사 수업을 그럭저럭 따라간 이라면 앞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테다. 두루 알려진 정답은 허균(許筠ㆍ1569~1618)의 <홍길동전(洪吉童傳)> 이다. 그러다가, 지난 1997년 채수(蔡壽ㆍ1449~1515)의 <설공찬전(薛公瓚傳)> 이라는 소설 일부가 발견되면서, 한글소설의 효시를 어느 작품으로 잡아야 할지가 모호해졌다. 일종의 귀신소설인 <설공찬전> 은, 왕명으로 모조리 불살라서 지금 전해지지 않는 한문 원본만이 아니라 1997년에 그 앞부분이 발견된 국문번역본도, <홍길동전> 보다 한 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홍길동전> 을 한글소설의 효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설공찬전> 이 본디 한문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중요한 논거로 삼는다. 한글소설은 ‘한글로 창작한다’는 작가의 의식을 담아야 하는데, <설공찬전> 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한글번역본’이 <홍길동전> 보다 이르다 할지라도, 여전히 <홍길동전> 을 첫 한글소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견해다.

이 문제를 들춘 것은 거기 딱 부러진 해답을 내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이 논란이 품고 있는 쟁점 둘을 끄집어내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려 한다. 하나는 관행의 늪 깊숙이 숨겨져 논자들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생각거리로, ‘한글문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인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 논자들이 드문드문 의식하는 생각거리로, 번역문학은 출발언어(번역되는 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도착언어(번역하는 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한글문학’ 또는 ‘한글소설’이란 뭘까? 손쉽게, ‘한글을 표기수단으로 삼은 문학’, ‘한글로 쓴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테다. 한국 고전소설을 ‘한문소설/한글소설’로 나누는 관점에도, 사용하는 ‘문자’에 대한 의식이 개입해 있을 게다. 그런데 이것이 타당한 분류일까? 적어도, 자연스러운 분류일까?

그 관행 바깥에서 잠시만 생각해보면, ‘한문소설’과 ‘한글소설’은 맞세울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이 또렷해진다. 그것은 한문과 한글이 맞세울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문과 한글은 왜 맞세울 수 없는가? 한문(Classical Chinese)은 고전중국어라는 자연언어나 그 자연언어로 짜인 텍스트를 가리키는 데 비해, 한글(Korean alphabet)은 1446년에 반포된 표음문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둘은 층위가 크게 다르다. 한글과 맞세울 수 있는 개념은 한문이 아니라 한자(Chinese characters)다.

그러니까 한문소설(고전중국어로 쓴 소설)은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지만, ‘한글소설’(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한 소설)은 아예 성립될 수 없거나 성립될 수 있더라도 거의 쓸모없는 개념이다. ‘한글소설’이 성립될 수 없거나 거의 쓸모없는 개념인 것은, ‘로마문자소설’이나 ‘키릴문자소설’이 성립될 수 없거나 거의 쓸모없는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문자소설’(로마문자로 표기한 소설)은 통상 로마자로 표기되는 이탈리아어소설, 영어소설, 스페인어소설, 프랑스어소설, 포르투갈어소설, 독일어소설, 터키어소설, 베트남어소설, 이 밖의 수많은 언어로 쓴 소설을 다 아우를 것이다. 더 나아가, ‘로마문자소설’은 통상적으론 로마문자로 표기되지 않는 한국어소설, 일본어소설, 중국어소설, 아랍어소설 따위를 로마문자로 전사(轉寫)한 텍스트까지 포함하게 될 테다. 이렇게 잡다하고 들쭉날쭉한 대상들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개념이 쓸모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한글로 창작한다’거나 ‘한글로 번역한다’는 표현이 (거의)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어떤 문자로 ‘표기’하거나 ‘전사’할 수는 있지만, ‘창작’하거나 ‘번역’할 수는 없다. 적어도 표준적 언어 사용에 따르면 그렇다. 텍스트를 짜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의 표현은 ‘한국어로 창작한다’거나 ‘한국어로 번역한다’로 고쳐져야 할 테다.

효시든 아니든 중세한국어로 창작된'홍길동전'고전중국어에서 중세한국어로 번역된'설공찬전'모두 한글문학 아닌 한국어문학에 속하는 것

<홍길동전> 은 한글로 창작된 소설이 아니라 (중세)한국어로 창작된 소설이고, 본디 한문으로 창작된 <설공찬전> 은 한자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고전중국어에서 (중세)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니까 효시든 아니든 <홍길동전> 은 ‘한글소설’이 아니라 ‘한국어소설’이고, 따라서 ‘한글문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문학’에 속한다.

‘국문소설’이라는 개념은, ‘한글소설’과 달리, 성립할 수 있다. ?뭐??? ‘한글’과 달리, 텍스트를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문소설/국문소설’은 개념화할 수 있는 대립이다. 물론, 거기서 ‘국문’이 한글이라는 문자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텍스트)를 가리킨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러나 ‘국문’은 완강히 자기중심적인 말이고, 이 말과 형태적으로 연결된 ‘국문학’은 통상 한반도에서 생산된 한문텍스트까지를 포함하므로, ‘한문소설/국문소설’의 병립보다는 ‘한문소설(고전중국어소설)/한국어소설’의 병립이 한결 깔끔하다.

마땅히 ‘한국어소설’, ‘한국어문학’이라 불러야 할 대상을 ‘한글소설’, ‘한글문학’이라 이르는 관행에 이해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향찰로 쓰인 향가나 부분적으로 이두를 사용했던 공문서들을 제외하면, 한국어는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어가 서기언어로서 살아온 역사는 한글의 역사와 거의 포개진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까지 한국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회화언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의 차이를 흐릴 수는 없다. 문자는 언어의 그림일 뿐이다. 그리고 이 화단(畵壇)에선 너무나 다양한 유파들이 제 개성을 뽐내고 있어서, 어떤 자연언어와 어떤 문자체계의 결합이 필연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한글소설’, ‘한글문학’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학술적’ 혼동은 일상어 수준에까지 널따랗게 퍼져 있다. 예컨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는 한글(번역)판이 수십 종이나 나왔어”, “4.19세대는 첫 한글세대야. 그 세대부터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됐거든”,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시에 고려인들을 위해 한글학교가 새로 들어섰다네” 같은 표현을 보자. 이미 관용적 표현이 된 터에 이런 식의 언어사용을 무턱대고 타박할 수는 없겠으나, 여기서 ‘한글’은 죄다 ‘한국어’로 고치는 것이 낫겠다.

물론 ‘한자를 전혀 쓰지 않고 한글로만 표기한 번역텍스트’라는 뜻으로는 ‘한글(번역)판’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또 ‘과도한 한글전용 정책 탓에 한자 교육을 받지 않은(못한) 세대’라는 뜻으로는 ‘한글세대’라는 말을 쓸 수 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글 스물넉 자와 그 맞춤법 원리만을 가르치는 학교’라면 ‘한글학교’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에 예시한 문장에서 ‘한글(번역)판’ ‘한글세대’ ‘한글학교’는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수십 종이 나온 것은 <어린 왕자> 의 ‘한국어(번역)판’이고, 4.19세대는 첫 ‘한국어세대’이며, 알마아타시에 들어선 것은 ‘한국어학교’다.

다음, <홍길동전> 과 <설공찬전> 의 ‘명예전쟁’이 제기하는 두 번째 문제를 서둘러 살피자. 번역문학은 출발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아니면 도착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예컨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프랑스어문학에 속하는가 아니면 한국어문학에 속하는가? 말할 나위 없이 그 둘 다에 속한다. 번역문학자는 프랑스어로 읽고 한국어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된 텍스트만을 놓고 보면, 그것은 한국어문학 쪽에 훨씬 더 가깝다.

문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거기 사용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번역이냐 창작이냐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실상 근대독일어는 루터의 번역성경으로 시동을 걸었고, 유럽의 다른 많은 언어들도 고대그리스어나 라틴어 같은 고전언어의 번역문들로 초창기 규범을 확립했다. 한국어도 예외는 아니니, 한글로 쓰인 첫 번째 한국어문장은 <훈민정음 언해> 라는 이름의 번역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어는, 다른 많은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번역을 통해서 본격적인 기록언어로 출발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고전중국어(한문)로 창작된 <설공찬전> 의 한국어 번역본이 한국어문학에 속하는지 아니면 고전중국어문학(한문학)에 속하는지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한국어본 <설공찬전> 은 고전중국어문학과도 발생적 관련이 있겠으나, 압도적으로 한국어문학에 속한다. 그 텍스트를 짜고 있는 언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한국어소설이다. 그렇다는 것은, <홍길동전> 이 오래도록 누려온, ‘첫 한국어소설’이라는 영예가 <설공찬전> 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도 있다. 현전하지는 않으나, 한글 창제 이후 명대(明代) 소설의 조선어 번역본이 적잖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번역소설 가운데 혹시라도 <설공찬전> 의 한국어본보다 더 시기가 이른 것이 있다면, 첫 한국어소설의 영예는 그 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홍길동전> 의 영예는 여전하다. 비록 그 주제와 구성에서 <수호전> 의 그림자가 엿보이기는 하나, <홍길동전> 은 고전중국어 소설텍스트와의 직접적 연관 바깥에서 쓰여진 첫 한국어소설이기 때문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