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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5> 조성오의 '철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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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5> 조성오의 '철학에세이'

입력
2007.01.3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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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그림을 한번 보자. 그림 A는 경찰이 도둑을 잡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B는 어떤 장면일까. 언뜻 보면 도둑이 경찰을 잡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뒤에 있는 사복 경찰이 도둑(가짜 경찰)을 잡아가는 것이다. 경찰이 도둑을 잡아간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외관상 두 그림은 반대다.

현상(사물이 외적인 조건에 따라 나타내는 일시적, 표면적 모습)은 거꾸로 돼 있지만 본질(배후에서 현상을 규정하는 것)은 같다. 본질과 현상이 다를 수 있다는 이 그림을,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ㆍ중반의 독자라면 어디에선가 보았을지 모르겠다. 이 그림을 담은 책, 바로 <철학에세이> 에서 말이다.

<철학에세이> 는, 어렵고 골치 아프다는 철학을, 제목처럼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식 철학책이다. 적절한 사례와 쉬운 용어, 적당한 삽화와 경어체 문장이, 부담 없는 대중 철학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200쪽이 조금 넘는 이 작은 책은, 1970년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가 그랬던 것처럼, 80년대의 젊은 독자에게 세상 보는 눈을 제시한 세계관의 교사였다.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면, <전환시대의 논리> 보다 더 한 의식화 교재였는지도 모른다.

<철학에세이> 가 말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 연관돼 있고 또 변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로 하여 변화의 철학, 변혁의 철학이다. 책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세계에 대한 근본 인식과 근본 태도라고 답한다. 그 답은 다른 말로 세계관이다. 세계관은 향락주의일 수도, 염세주의일 수도, 또 숙명론일 수도, 현실주의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고 그 점에서 철학은 곧 실천의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맞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허위 의식에 사로잡혀 사회적 위치 혹은 계급과 다른 세계관을 갖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철학에세이> 는 또 양질전환의 법칙(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는 법칙), 모순(하나의 질이 다른 하나의 질로 변화하는 질적 변화), 물질과 의식 혹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관계,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내용과 형식, 본질과 형식, 원인과 결과 등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이론을 소개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중심으로

사례 제시 등 알기쉽게 풀어내

대학 신입생들 철학 입문서로 각광

“시대적 한계 있지만 진리는 안 변해”

<철학에세이> 가 1983년 처음 출판됐을 때 저자는 ‘도서출판 동녘 편집부’였다. 그 때는 실제 저자가 편집부인 경우도 있었지만, 서슬 퍼런 시절이어서 저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호한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저자를 처음 밝힌 것은 10년이 지난 93년 개정판을 낼 때였다. 조성오(49). 지금은 변호사지만 책을 낼 당시 그는 난곡의 야학 교사였다. 80년 ‘서울의 봄’을 기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 서적이 반합법적으로 유통됐는데, 야학 동료들이 갖고 있던 국내외 관련 서적을 모아 그 내용을 대중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 추가해 <철학에세이> 를 썼다. <철학에세이> 는 그래서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또 학문적인 깊이나 폭을 따지면 한계가 있다.

당시의 독자가 지금 다시 읽는다면 약간 싱거운 맛이 날 것이다. 세상 보는 법, 세상 사는 법을 도식화, 단순화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저자 역시 강하게 반박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책에 학문적 비판을 하는 것도 우습고, 그것을 반박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입시 전쟁을 통과한 대학 신입생에게, 세상을 이렇게 보라고 선배가 권하는 ‘시각교정용’ 서적, 철학 입문서였다. 조성오 변호사는 “주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지만, 글의 톤이 강하지 않고 생활 속 사례를 제시했기 때문에 신입생들이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철학에세이> 는 출판 되자마자 대학 신입생의 필독서가 됐다. 조성오 변호사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근본적인 변화의 철학을 표방한 <철학에세이> 가 나온 것이죠.”

<철학에세이> 에서는 1980년대의 출판 풍경을 읽을 수 있다. 문화공보부가 납본도서를 읽은 뒤 도서 판매를 금지할 수 있던 사전검열의 시대였다. 하지만 평범한 제목 때문이었는지 <철학에세이> 는 판매금지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시국사범의 집에서 이 책이 잇따라 발견되자 판매를 허용한 문공부 직원은 속앓이를 한 끝에 발행 출판사인 동녘을 방문, “책을 그만 팔아라”고 종용했고 출판사측은 “이왕 찍었느니 초판만 팔겠다“고 맞서 그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그 뒤 출판사는 수년 동안 책을 찍고 또 찍으면서 雍?초판이라고 했고, 그 때문에 정확한 판매부수를 계산하지 못했다. 50만부가 팔렸다고도 하고 100만부가 팔렸다고도 하나 모두 추정치일 뿐이다.

야학을 하던 저자와 그 동료들은 당시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는데 가난한 그들에게 번역은 중요한 생계 유지 수단이었다. 번역을 하면서 출판사 몇 군데를 알았고 그 인연으로 동녘에서 책을 냈다. 조성오 변호사는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면서 2만~3만부만 나가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변호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는 저자는 지금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비록 제가 책을 쓰긴 했지만, 지금은 책의 시대적합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점진적인 사회 변화가 현실적 대안으로 떠올랐고,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철학에세이> 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변증법적 유물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대 상황에 따라 책의 상대적 가치가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지만, 연관과 변화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명제만은 영원한 진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출판사는 2005년에 다시 개정판을 냈다. 옛날 만큼은 아니어도 수요가 웬만큼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희건 편집주간은 “<철학에세이> 는 지금도 연 3,000부 안팎이 판매되는 스테디 셀러”라며 “논술시험 대비용으로 찾는 고교생 독자가 생겼다는 점이 옛날과 다르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칸트, 니체 등의 철학 서적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사회 상황에 절망하던 80년대 초의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는 현실과 괴리가 있었다.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던 젊은 세대에게 <철학에세이> 는 희미하게나마 방향을 보여준 책이었다. 철학을 대중 출판의 한 장르로 개발했다는 점에서 출판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 25세에 책 펴낸 조성오씨는 누구

<철학에세이> 의 저자 조성오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법무법인 이산(移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유명 학자도, 사회 명사도 아닌 그가 스물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전공도 아닌 철학 책을 내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과정을 보면 격동의 지난 시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77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해 이듬해 법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에서 제적된 형을 생각하며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었으나 78년 6월 광화문 가두 시위에 참가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의협심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참가했는데 하필 경찰에게 잡히는 바람에 6개월 실형을 살고 학교에서도 쫓겨났다. 그를 포함해 당시 19명에게 실형이 선고됐는데 모두 단순 가담자였다.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했으나 그 해 여름 다시 제적됐다.

단순 시위 가담 학교서 쫓겨나

공단서 노동운동·야학하며 책 내

94년 복학해 변호사로 변신

그는 별 것 아닌 일로 두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난 뒤에야 비로소 운동권이 됐다. 난곡의 야학을 거쳐 구로와 인천의 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세상이 바뀌면서 운동 방식에 회의를 품다가 94년 서른 여섯의 나이로 복학한다. 뒤늦게 학교로 돌아온 그는 열심히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처럼 노동운동을 거쳐 사법시험에 합격한 동료들과 같이 연 변호사 사무실이 바로 법무법인 이산이다.

그는 단순 시위자마저 학교에서 몰아내는 사회에 질렸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젊은 날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 마음이 아픈 것은, 사회 운동의 대의가 부정되는 현실이다. 방식이 옳은가, 그른가를 놓고 논란이 있겠지만, 적어도 개인보다는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한 그 시절 사회운동의 정신만은 평가해 주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약력

-1958년 대전 출생

-1977년 대전고 졸업,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1983년 <철학에세이> 출판

-1994년 복학

-1997년 사법시험 합격

-1998년 서울대 사법학과 졸업

-2000년 변호사 개업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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