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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7> 유민영 ‘한국인물연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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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7> 유민영 ‘한국인물연극사’

입력
2007.02.14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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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 가는 세상. 사람 이야기는 현상과 사건을 전하는 데 효율적인 매개가 된다. 그러나 도를 지나치면 모든 현상을 인간 중심으로 귀결짓는 환원론, 또는 객쩍은 잡설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과학성과 객관성을 전가의 보도로 삼는 학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물론이란 참으로 까탈스럽다. 스타 아니면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양분되기 십상인 사람 이야기가 학문의 세계로 오면 거르고 정제해야 할 부분이 많다.

유민영(71) 단국대 석좌교수의 <한국인물연극사> 1, 2(태학사 발행)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책은 스타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난 연극 배우의 모습을 온전히 되살려 내면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대중적 스타도, 그렇다고 외곬로 파들어가는 학자도 아닌 연극 배우들이 두툼한 하드 커버 책에 실려 빛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장장 15년에 걸친 인물사 작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훨씬 앞선 <대담 연극사>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 중반부터 당시 생존했던 연극인들 이를테면 변기종 서월영 복혜숙 석금성 유치진 박진 진랑 김연수 등 원로를 찾아가 릴 테이프 녹음기를 들고 스케치해 나갔다. 그것은 한국 연극이 싹트고 만개해 영광을 누리다, 뮤지컬과 각종 매체에 의해 영토가 급격히 축소되기까지의 시간이다.

유 교수가 지난해 두 권을 탈고한 것은 집필 11년만의 일이다. 1권에 7년, 2권에 4년 걸렸다. 원고지로는 7,000장, 책의 부피로는 각각 800여쪽이다. 그야말로 풍찬노숙해 가며 극장이 될만한 곳이면 관객들 앞에서 한판 무대를 올린 뒤, 박수 속에 덧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이 예술의 이름 아래 환생했다.

저자의 말을 빌면 “어느 식자도 살뜰하게 기록해 놓지 않은 하찮은 광대들”이다. 조선시대 탁월한 국민 음악극의 창시자 신재효, 근대 창극의 대부 이동백, 판소리와 창극의 영원한 대스타 김소희 등 도입부에서부터 책은 연극의 영토를 널찍하게 잡고 길을 뜬다. 희곡사, 극장사, 근대연극사 등 한국 연극에 대한 3부작을 완성하고 난 뒤 씌어진 책은 한국의 연극적 자산에 대한 심층 탐구다.

열악함 속 무대 지켜 낸 원로들 열정 증언

음지로 가고 있는 현재 연극계 향해 충고도

“예술이란 삶의 그림자”라고 그는 말했다. 그 본질, 즉 사람에 대한 탐구는 2부로 오면 더욱 저널적이다. 근대 무대 예술의 기반을 다진 거인 유치진을 비롯해 임영웅 여석기 이두현까지 원로들의 행적이 손에 잡힐 듯하다. 특히 공산주의적 민족 운동을 하다 탄압을 받고 결국 정신질환에 내몰린 오영진의 삶을 기록하는 그의 붓은 더욱 뜨겁다.

“1968년부터 작품으로 의기 투합, 그의 집인 복지아파트까지 가서 새 희곡도 읽어주던 사이로 발전했죠.” 한동안 뜸하다 1973년 한양대 교수 재직 시절,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유학하다 잠시 귀국해 만난 일을 그는 잊지 못한다.

아픈 몸을 끌고 명동 국립극장에 가서 김소희의 판소리 <심청가> 를 보고 온 오영진, 함께 명동의 어느 다방에 앉아 있는데 갑자지 “왜놈이 쳐들어 온다”며 뛰쳐 나가는 바람에 겨우 진정시켰던 그 불우한 연극인이 남긴 기억은 훗날 유 교수의 역저를 추동하는 채찍이었다.

연극인들과 피부를 맞대오던 그가 인물 통사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1990년대 이후. 갈수록 야위어가는 우리 연극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까닭.

“영화는 DJ때 본격적 인프라를 깔아 융성해졌죠. 지금 목도하고 있는 영화붐이 바로 그 결과죠.” 그러나 당시 빛을 보이던 문화 정책과 그에 따른 성과는 현 정부에서 실종됐거나, 적어도 업 그레이드 되지 못했다는 것. “뮤지컬 전용 극장도 우리 자본으로 만들어야 하고, 정극 지원도 적어도 10여 개 극단에게 실질적 혜택이 돌아 가게 해야죠.”

책은 필연이다. 희곡사, 극장사, 근대연극사 등 한국 연극에 대한 3부작을 완성하고 난 뒤, 그의 눈에 들어 온 공백을 메우고 싶었다. “연극인들에 대해 파들어가면, 엉성한 한국 연극사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유 씨는 궁핍했던 옛 시절보다 지금의 연극이 더욱 왜소해지지 않았는지 걱정한다. “오락거리가 너무 많아진 시대, 언론에 나타나는 연극이라곤 뮤지컬 정도 아닌가요.” 특히 뮤지컬의 물량 공세를 보노라면 정극에게 주어진 공간은 갈수록 좁아지는 것만 같다.

“뮤지컬은 엄청난 물량 공세로 최신작을 직수입하는 상황이지만, 원천수인 정극이 살아야 뮤지컬도 사는 거죠.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예요.” 연극인들의 치열한 도전 정신만이 관건인 것은 아니다.

정부의 특별한 지원책이 절실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아 정극은 고사 직전이에요. ㅊ? 기업, 언론 등의 연극에 대한 지원이 갈수록 소홀해지고 있잖아요. 인문학을 살린다며 야단들인데, 예술의 기초인 연극이 죽어가는 데는 관심이 없죠.” 연극계에 대해서도 날이 서 있다. “연극인 스스로 대중에게 충격을 줄만한 작업에 소홀한 것 아닌가요. 심하게 말하면 후원금 타 내기 위한 창작 작업의 관행이 계속되잖습니까.”

당연히, 유 교수는 3권이 자신을 견인하는 힘을 느낀다. “1935년 이후의 출생자들로 여전히 우리 연극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죠. 오태석 윤대성 박정자 손숙 이윤택 손진책 김동훈 김상렬 윤석화….” 그것뿐 아니다.

“그 동안 제대로 정리 안 된 해방 후 연극사 작업을 한번 마음 먹고 해 볼 생각입니다.” 서울 중심의 연극사를 극복, 북한까지 포괄한다는 구상이다. <연극평론> 가을 호부터 본격 연재에 들어가기로 돼 있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 역사 서술의 가장 큰 문제인 시대 구분 문제에 봉착했다고 그는 말했다. 결국, 현대 연극을 어디에서부터 볼 것인가의 문제다.

“일제의 억압이라는 사회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연극 활동이 아니라, 연극과 인간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 연극사를 전개해야죠.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 복잡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역시 수 십년 동안 모은 방대한 자료는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원고지 5,000~6,000매로 구상중인 이 책은 3년쯤 지나면 빛을 볼 거라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 가자. 연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가집 자제이기도 했던 선구적 연극인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열악한 상황에서 연극을 저버리지 않고 지켜왔을까. 유 씨는 자문했고, 답을 냈다. 두 권의 책을 쓰는 동안에 이해란 석금성 고설봉 강계식 강유정 허규 김동원 차범석 등 1세대들이 갔다. 그들의 영욕을 유 교수의 책들은 증언하고 있다.

“왜 연극은 그렇게 음지 속으로 가고 있나. 뮤지컬이나 각종 매체의 발호가 그에 대한 답인가. 연극인 스스로 대중에게 충격을 줄만한 작업을 하는 데 게을렀지 않았나. 후원금 타내기 위한 창작 작업에 머무르지 않았나.” 그 질문에 후학, 아니 연극계가 답해야 할 차례다.

■ 평이한 서술로 ‘학문의 대중화’… 언론과 긴 인연

그는 좀 별난 학자다. 일반인들에게 자신의 학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론과의 오랜 인연 덕택에 그는 사람들과 낯을 많이 텄다. 분명 학술 서적이지만 그의 저서가 일반인들에게 언뜻 다가설 수 있는 것은 사실을 중심으로 한, 평이한 서술 덕택이다. 무엇보다 글의 메시지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1972년, 한국일보 지면을 두드리면서 길은 1990년까지 이어졌다. 말이 쉬워 4반세기다. 분명한 논지와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뭉친 글은 편집자들의 눈에 금방 띄어, 문화면 한 면을 혼자 쓰는 경우까지 있었다. "부지런했던 덕택이죠. 학술과 비평, 둘 다 소홀히 안 했어요." 여타 신문들도 글을 부탁했고, 훗날 고정 필진을 맡을 정도로 그의 글은 신뢰를 주었다. <월간중앙> , <신동아> 등 잡지쪽에 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맡은 일에 꼼꼼하고, 일단 시작한 일은 철저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가 딴 마당이라고 해서 변할까. 그 같은 특장점은 교수 일에도 이어졌다. 예술대학장을 5년, 예술대학원장을 6년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지런했어요. 학문과 비평, 어느 하나 소홀히 한 적 없죠."

"취미라 할만한 게 없다"고 그는 이유처럼 말했다. "인물사 쓰면서 우울증ㆍ무기력을 극복하는 거죠. (글 쓰는 게)최선책이에요." 두 권을 잇달아 내고 처음으로 석 달 푹 쉬었다고 한다. "그래도 한 달에 연극 한두 편은 꼭 봐요."

약력

1937년 경기 용인 출생

1957년 서울대 국문과 입학

1970년 한양대 국문과 교수

1974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 연극학과 박사

1986년 단국대 예술대학장

1993년 방송위원회 위원

2000년 단국대 석좌교수 겸 문화예술대학원장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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