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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13> 김구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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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13> 김구 '백범일지'

입력
2007.04.0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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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의 예에서 보듯, 서구에서 자서전은 유명 인사라면 누구나 출간하는 문학의 중요 장르이며 역사적인 자료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 받는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서전을 꼽으라면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白凡逸志)> (국사원)가 단연 눈에 띈다. 올해로 출간된 지 60돌을 맞은 이 책이 여전히 우리시대의 명저로 인정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 <백범일지> 에 버금가는 자서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이 초ㆍ중ㆍ고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교양서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 이 책의 가치를 매긴다면, 그것은 나무만 보고 정작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다.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한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에 오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극적이다. 이 책 <백범일지> 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뚫고 민족 지도자로 거듭나는 백범의 생애와, 구한말부터 해방 직전까지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동시에 보여준다. 백범의 내면적 동력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큰 미덕이다.

1997년 다시 나온 <백범일지> (돌베개)를 주해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백범은 동학, 위정척사, 불교, 기독교 등을 접한 뒤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가, 민족주의자, 통일운동가로 활동했다”며 “당시 거의 모든 구국 사상의 조류를 받아들인 셈”이라고 말했다.

도 교수의 지적처럼, <백범일지> 를 더욱 비범하게 만든 것은 백범이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면서 보여준 인식의 전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이다. 백범은 과거의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것만 좇지 아니하고, 과거로부터 긍정적인 면을 계승하고 이를 새로운 사상과 융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백범의 삶을 관통하는 민족주의라는 사상은 동학의 평등적 세계관, 위정척사의 민족적 의식, 개화사상의 근대적 선진성을 계승하고 양반적 세계관, 화이론적 세계관, 식민주의와의 친화성 등을 탈각시키며 발전을 거듭한 것이다. <백범일지> 는 구한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窓)’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개인의 역동적인 사상의 변화와 성숙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일지(逸志)’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에 가려진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자 했던 백범의 의중은 책의 구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947년 출간된 국사원 본을 기준으로 본다면 <백범일지> 에는 상권, 하권 그리고 속편 격인 귀국 직후의 활동과 <나의 소원> 이 수록돼 있다. 상권은 1928, 29년 백범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노모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떠나 보낸 시기에 쓰여졌다.

따라서 목숨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생애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인 셈이다. 반면 하권은 1942년 중경임시정부 당시 해외 동포를 포함, 독자를 어느 정도 고려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경과를 알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상이한 성격의 상ㆍ하권에 대한 평가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도진순 교수는 “상권은 사적인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유서 형식의 글인 만큼 그 진정성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백범학술원의 신용하(이화여대 석좌교수) 원장은 “개인의 성장과정을 서술한 상권에 비해 자신이 걸어온 독립운동에 대한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한 하권의 사료적 가치가 더 높다”고 말했다.

<백범일지> 는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금서로 분류돼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고 독자도 소수였다. 그러나 4ㆍ19 이후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백범일지> 도 뒤늦게 주목받는다.

많은 문인, 교수, 사회운동가들이 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이 책을 완독한 것이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최근 이 책을 추천 도서로 소개한 것 등을 보면 <백범일지> 는 여전히 정치인의 필독서다.

<백범일지> 의 아쉬운 점이라면 신탁 통치 이후 조국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 백범의 행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범은 <나의 소원> 을 통해 자신이 만들고자 한 대한민국의 모습과 이를 위한 실천 방안을 보여주었다.

백범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힘은 무력, 경제력, 자연과학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라고 역설했다. 탈냉전 이후 문화로 대변되는 ‘연성 권력’(soft power)의 중요성을 주장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의 견해에 견주어볼 때 백범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물론 백범이 당시 신탁통치, 분단, 냉전 등과 같은 현실 정치를 순진하게 받아들여 이상적인 주장을 펼쳤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게다가 해방 직후에는 교육과 문화가 아니라 안보와 경제가 훨씬 중요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신용하 원장은 “눈 앞의 정치적 이익에 사로 잡히지 않고 강대국이 강요하는 구도를 뛰어넘으려 한 백범의 사상을 주목해야 한다”며 “<백범일지> 를 통해 드러난 그의 사상은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대적 화두(話頭)이며 우리가 앞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 백범 김구 연보

1876년 - 황해도 해주 출생, 아명은 창암(昌巖)

1896년 -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중위 살해. 투옥

1898년 -; 탈옥 후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됨

1914년 -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침

1919년 - 중국으로 출국. 상해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6년 -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1928, 29년 - <백범일지> 상권 집필

1940년 - 임시정부 초대 주석으로 선출

1942년 - <백범일지> 하권 집필

1945년 - 일본 항복 후 환국. 반탁운동 전개

1947년 -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간행

1948년 - 김규식 등과 평양 행. 남북협상 후 조국통일에 관한 공동 성명서 발표

1949년 -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피살

■ '백범일지' 1947년 백범 생존때 첫 출간… 편집에 춘원 이광수도 참여

<백범일지(白凡逸志)> 는 백범의 유일한 저서이다. 그의 명성에 걸맞게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 책은 현존 도서 가운데 이종(異種)이 많기로 유명하다. 1947년 국사원에서 처음 나온 뒤 출판사를 바꿔가며 현재까지 20여 회에 걸쳐 복간을 거듭했다. 어린이용 동화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80여 종이 나왔다.

<백범일지> 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국사원에서 간행된 <백범일지> (1947), 백범의 측근에 의한 필사본을 바탕으로 서문당에서 간행된 <원본 백범일지> (1989), 유족이 공개해 집문당에서 영인한 친필본 <백범일지> (1994)가 그것이다. 물론 원본은 유족이 소유한 친필본이다. 그러나 대중에겐 국한문 혼용의 친필본보다 윤문을 거친 교열본이 친숙하다.

최초의 교열본인 국사원본 <백범일지> 는 출간본의 시조라는 의미 외에도 백범 생존 당시 출간됐다는 사실 때문에 상당한 권위를 지닌다. 국사원본에는 유족이 소장한 원본에 없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1942년 이후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활동, 그리고 귀국 후 백범의 행적과 <나의 소원> 이 그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국사원본은 원본과 대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

국사원본의 또 다른 특징은 편집에 춘원 이광수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국사원본은 교열본 중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국사원본은 원본을 많이 생략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백범이 저술할 당시 상ㆍ하권을 예상하지 못했고, 집필에도 시차가 있어 내용의 중복으로 인한 생략과 요약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또 원본에 수록된 윤봉길 의사 거사 직후 상해 민족운동단체의 동향과 이에 대한 백범의 비난에 대해 국사원본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서문당본도 제목에서와 같이 원본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는 1947년 한민당 총무였던 장덕수 암살사건의 재판에 대한 증거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급하게 필사한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교열본에 비해 삭제 부분이 적지만 필사본에서 누락한 부분을 그대로 반복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백범일지> 연구를 위한 영인본 외에도 대중을 위한 정확한 교열본이 필요하다"며 "거듭된 출간으로 인한 오류의 반복을 경계하고, 텍스트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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