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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1> 박홍규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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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1> 박홍규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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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30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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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질서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나는 매우 적고 눌변입니다. 그 점이 우선 죄송하고, 또 원고를 써 온 것도 아니고, 그때 그때 그저 생각나는 것을…” 바로 그 때문에 더 그립지 않은가.

“뭐 질문 없으세요? 고생을 죽도록 하시고. 허허허….” 강의를 열심히 듣던 늙수그레한 학생에게 건넨 말이다. 그러나 “자네들, 하나도 안 읽었구먼. 몇 번을 읽어야 돼”라며 다그치는 모습은 김홍도의 풍속화에나 나올 법한 훈장이 제격.

이념 대결, 파편화한 지식 상품, 이 시대의 빅 브라더 인터넷…. 불과 몇 년 사이다. 0 아니면 1이 만들어 내는 매트릭스의 세계에, 또 반성할 줄 모르는 포퓰리즘의 너울에 우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깊이 연루돼 간다.

철학자 고 박홍규 씨의 강의록에는 분명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고대 철학을 디딤대 삼아 현재와 미래를 논해 가는 풍경은 이 시대가 놓쳐 버린 미덕이 뭔지를 깨닫게 한다.

그 장면, 장면을 한 두름으로 쭉 펼친 책이 ‘박홍규 전집’(민음사)이다. 현재 4권까지 나와 있는 이 책은 제 1권 <희랍 철학 논고> 를 기점으로 2ㆍ3권 <형이상학 강의> , 4권 <플라톤 후기 철학 강의> 로 이뤄져 있다. 베르그송을 논한 5권 <창조적 진화 강독> 은 출판을 위한 막바지 작업 중이어서, 이 시리즈의 의미가 새삼 새록새록하다.

“학생들은 한 문장, 한 단어도 흐리멍덩하게 지나가는 법이 없이 의미가 완벽하게 이해될 때까지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치열했고 대부분의 경우 선생님의 설명으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때로는 선생님 자신께서 애매해 하시는 부분도 있었다.” 최화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조만간 나올 제 5권의 서문에서 증언하는 1980년대 말 박홍규 강의실의 풍경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한 <시간과 존재> 는 책으로 엮어낼 요량으로 진행된 강의를 기록한 것이어서, 한 군데의 둔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 비하면 우연적이고 종합적이다. 전집 간행위원회가 “여러 필사본의 윤문 작업과 더불어 필사본을 녹음 테이프와 대조하는 고통스런 작업 그리고 모든 윤문 원고들을 필사본과 대조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는 저간의 사정이 숨어 있다.

이 저작은 또 교수평가제라는 실증적 잣대로 교수들의 학문적 성과를 재단하는 요즘의 시각으로 볼 때, ‘서양 철학 소고’ 등 단 6편의 논문 밖에 남기지 않은 고 박 교수는 참으로 큰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공표한다. 그러한 점에서 책은 이 시대의 이상한 잣대에 대해 근본적 검토를 요청하는 방대한 선언문인 것이다.

논문, 강의록, 학생들과의 대화 등 세 형식으로 짜여진 책은 1985~1989년 이뤄진 강연을 일일이 손으로 옮기고 다듬은 결과다. 전라도 토박이 사투리가 심했던 그의 말은 윤문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강의실의 뜨거운 아우라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은 그 전설적 명강을 직접 듣지 못 한 사람들의 아쉬움을 눅이고 남는다.

얼른 듣기에는 매우 비현실적일 것 같은 형이상학자이지만, 박 교수가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것은 ‘철학도 실제 생활과 연계돼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철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주제들임에도 불구, 책은 대화의 묘미가 살아 있다. 특히 전집 3권인 <형이상학 강의 2> 는 일반인들에게 가장 넓은 길을 열어두고 있다.

그 강의의 매력은 자신의 실제적 체험과 철학을 연계해 흥미를 유발해 내는 방식에 있다. “내 체험을 좀 얘기 해야겠는데, 왜냐하면 나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까.

플라톤 철학을 우리가 하나하나 느끼(feeling)면서 읽어야 해.…(중략) 나는 전쟁 시대에 살았지만…(후략)” 그의 철학은 언제나 선명했고, 철학적으로 실재적이었다. 2권에서 밝히는 대로 “철학이란 피와 살을 갖고 있으며, 정신을 소유한 인간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간은 사회적이며 역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204쪽)

철학이라는 고도의 추상 작업을 통해 맺어진 사제 관계였지만, 그 저류에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감이 있었다. 5권은 이렇게 쓴다. “강의가 끝난 토요일 저녁마다 관악구청 맞은편 <한잔집> 에 모여 그날의 강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파전과 막걸리로 토론을 벌이던 찬란한 젊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은 정녕 우리 시대, ‘Deux Magots’였다.” 1920년대 프랑스에서 실존주의 작가들이 모이던 아지트처럼, 그의 강의실에는 굳건한 연대감이 넘쳐 있었다.

박 교수는 플라톤과 베르그송을 통해 형이상학의 원리를 파악했다. 세계적으로 비근한 예를 찾기 힘들다. 그가 “서양 철학보다 깊은 형이상학 이해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그 같은 까닭이 있다. 학생들은 그의 진지한 철학을 곧 현실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 들였다. 꿈 현상, 미개인의 인지와 성정, 희랍 신화 등 기존의 철학계에서 소홀하기 일쑤였던 주제들이 진지한 철학의 대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그 덕분이다.

인간의 가치와 총체성을 지고의 가치로 삼은 희랍 철학은 우리 시대를 반성케 한다. 영혼의 양식을 도시에서 도시로 끌고 다니면서 도매하거나 소매하는 사람도, 수단도 무한 증식해 가는 시대다. 이런 때,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떻게 들릴까. “타인에게 해독을 끼치고 자기 이익만을 취함으로써 도시 국가의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파렴치한 사람들.” 1권 61쪽의 <소피스트에 대한 규정> 중 한 대목이다.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쳐 나는 이 시대지만 고대 그리스에도 비슷한 유형의 인간들이 있어 철인 소크라테스의 통박을 받았다. 우리의 철학적 거두는 질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 가며 전해 줬고, 당시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명강을 녹취하던 학생들은 한국 철학의 스승이 됐고, 육성을 문자로 풀어 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 강의록집이었다가 현대 철학의 대표적 저작으로 변한 것과 유사한 이치다. 단, 하이데거의 저작이 책을 염두에 둔 계획적 강의의 결과라면, ‘박홍규 전집’은 책을 염두에 두지 않은 강의였다. 거의 희곡을 방불케 하는 놀랍도록 생생한 대화가 활자화한 것은 그래서다.

이태수 김남두(서울대) 양문흠(동국대) 기종석(건국대) 박희영(외국어대) 이정호(방송통신대) 최우원(부산대) 염수균(조선대) 최화(경희대) 강상진(목포대) 교수 등 대학 철학과를 비롯해 철학과 실제를 긴밀히 이어주는 철학자들이 그의 제자다. 생활 속의 철학하기 쪽에 열정을 쏟는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 이정호(정암학당장) 등은 그의 또 다른 면을 잇고 있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건 고답적 회합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를 찾아 나선 일군의 용사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절대적 허락만이 이뤄 낼 수 있는, 진정 열려진 그 공동체의 수장이 박홍규 선생이다.

▲약력

1919년 광주 출생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제일고등학교 입학

1940년 와세다대학 영문과 입학, 1년 뒤 철학과에 재입학

1945년 경성치대 전임 강사

1946년 서울대 문리대 강사, 철학과 교수

1984년 정년 퇴임

1986년 한국서양고전학회 창립

1994년 별세

●제자 최화 교수 5권 작업“세배하러 간 어느날 공부한다고 문전박대”

윤문, 녹음 테이프와의 대조, 최종 정리 등 원시적 수작업을 일일이 수행하고 거기에 최종 OK 사인을 낸 주인공이 바로 최화 교수다. 달리 말하면 대스승의 육성과 영기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운 좋은 학생이었다.

현재 박홍규 전집 제 5권 <창조적 진화 강독> 간행의 막바지 작업에 분주한 최 교수는 “술, 담배 않고 공부만 하던 분이었다”며 “여행 갈 계획을 세우시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스승을 기억했다. 1994년 3월 숨을 거두기까지 박 교수는 간경화증 말기로 3개월째 병고를 치르고 있었고, 최 교수는 교대로 스승의 병상을 지키던 제자 중 하나였다.

서울대 법대생으로 철학에 뜻을 품던 그를 돈오돈수케 한 계기가 선생의 강의였다. “하이데거를 공부하던 중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게 진짜 철학이라고 무릎을 탁 쳤어요.” 독사(doxaㆍ자기류의 견해)가 아닌, 에피스테메(epistemeㆍ인식)로서의 철학이 눈앞에 현현하던 순간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시죠.”

1980년대 어느 정초, 세배하러 과천의 자택에 갔더니 “공부한다”며 들여 보내주지 않은 적도 있다고 그는 전했다. “당시 건강이 안 좋으셔서, 선생님께 공부 시간이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던 저희들은 오히려 흐뭇했어요.” 차츰 스승의 또 다른 면모들도 알게 됐다.

“4ㆍ19 때 교수 데모단의 일원이셨죠. 저술 작업보다 제자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어요. 마치 플라톤처럼.” 한국프랑스철학회 총무이사이기도 한 최 교수는 “세계적 철학 명품, 한국에는 빅홍규 선생이 계신다”며 크게 웃었다.

강의를 특정 주제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논한 강의는 “선생이 돌아가신 뒤는 없다”며 최 교수는 스승의 스러짐을 아쉬워 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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