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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2>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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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2>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입력
2007.06.0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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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천년동안 우리 겨레는 끊임없이 남의 나라 말과 글에 우리 말글을 빼앗기며 살아왔고, 지금은 온통 남의 말글의 홍수 속에 떠밀려 가고 있는 판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이 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날마다 텔레비전을 쳐다보면서 거기서 들려오는 온갖 잡탕의 어설픈 번역체 글말을 듣고 배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이오덕(1925~2003)의 <우리글 바로쓰기> (한길사)는 엄한 선생님의 따끔한 회초리와 같은 책이다.

권위주의와 유식병이 판을 치던 시절, 이오덕은 정작 지식인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말과 글을 병들고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신문과 잡지, 방송을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쓰는 말 가운데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일본말과 한자말, 서양말의 문제를 자세하고 솔직하게 지적하며 ‘말의 민주화’를 주장했다.

우리글과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 책은 1989년 나오자마자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책의 반응이 뜨겁자 92년 개정판을 내면서 잡지에 연재하거나 발표한 글을 모아 2권을 함께 냈고, 95년 3권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1권(개정판)은 34쇄, 2권은 22쇄, 3권은 12쇄를 찍었고, 총 20만부가 팔려나갔다.

우리말과 글에 관심있는 사람들, 글을 쓰거나 쓰려는 사람들의 책장에는 어김없이 이 책이 꽂혔다.

경북 청송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오덕은 스무살부터 43년간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다. 동시, 동화, 수필, 아동문학 평론, 글쓰기 교육 등 80여권의 책을 냈는데, 이 책들은 모두 ‘우리 말과 글 살리기’에 닿아있다.

그는 말과 글을 바로 써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는 <우리글 바로쓰기> 의 서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한번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으로도 할 수 없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써 창조하고 우리 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글 바로쓰기> 는 어떤 국어 교육책보다 풍부한 사례를 들고 있다. 또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까지 제시했다.

일본말의 영향으로 쓸데없이 남용되는 조사 ‘의’와 ‘진다’ ‘된다’ 같은 피동형, ‘수순’ ‘입장’ ‘미소’ ‘~에 다름 아니다’ 등 일본말을 그대로 쓰는 표현, 영어의 과거완료 시제에서 나온 ‘~었었다’, ‘~적(的)’ ‘~화(化)’ 같은 한자말투, ‘조우’ ‘편린’처럼 공연히 어렵게 쓰는 한자말 등 오염된 우리 말과 글의 현실을 실제 사례를 통해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언문일치’가 아니라 거꾸로 ‘문언일치’를 보여준 온갖 소설들도 그의 비판 대상이 됐다. 독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구체적인 궁금증도 하나하나 풀어줬다.

이오덕은 삶에서 나온 말과 글이 가장 값진 것이며, 말하듯 쓴 글,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글 바로쓰기> 의 문장 역시 쉽고 명쾌하다. 그래서 더욱 호소력이 있다.

그는 이 책의 학문적 근거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내 생각의 뿌리는 나 자신이고, 내가 알고 있는 우리 말이고, 말을 하면서 살아온 백성과 민중들입니다”라고 답했다. 그가 ‘모람’(회원) ‘먹거리(먹을거리)’ 같은 우리 말 신조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우리 말을 써야 하지만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말까지 순 우리말로 바꿔놓으면 도리어 거북하다고 했다. 이오덕은 “별난 말을 만들어내서 퍼뜨리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말을 써서는 지식인들의 권위가 안 서고 지식 장사가 안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또한 삶과 현실이 아닌 관념 속에 갇혀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글 바로쓰기> 는 한길사 김언호 사장의 권유로 출판됐다. 김 사장은 77년 나온 이오덕의 아동문학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 을 읽고 크게 감동해 이듬해 <삶과 믿음의 교실> 을 출판하면서 이오덕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20여권의 책을 냈다.

김 사장은 “이오덕 선생이 80년대에 안암동의 출판사 사무실에 자주 오셨는데 그 때마다 오염된 우리 말과 글의 문제를 걱정하셨다. 그래서 책으로 쓰시라고 권유했다”고 돌이켰다.

김 사장은 “<우리글 바로쓰기> 는 문법에 치중한 딱딱한 글쓰기 교육 책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글 운동을 담은 책이며, 이오덕 선생은 어떤 한글학자보다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말했다. 또 “이 책을 통해 일어난 우리 것에 대한 각성은 민족주의 정서와 민주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우리글 바로쓰기> 는 언어의 순수성에 지나치게 집착해 현실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언어 표현의 가능성을 제약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지고, 반성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너무나 크다.

이오덕은 이 책이 나온 후 “많은 사람이 공감의 뜻을 말해주었지만 내가 그토록 애써 비판한 신문의 글은 여전히 그대로 나오고 있다”면서 “겨레의 넋이 담긴 말이 남의 말글로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아무 대답이 없으니 이거 참 답답할 노릇이다”라고 했다. 아마 지금도 그는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이오덕 선생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

이오덕은 교육과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책을 썼을 뿐 아니라, 연구와 실천을 위한 단체에 참여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비롯해 어린이도서연구회,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마주이야기교육연구소 등이 그가 만들거나 관여한 단체들이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여전히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 나온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일하는 아이들> 같은 책을 보고 전국 각지의 교사들이 이오덕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이오덕은 이들을 모아 83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었다. 처음에 47명이었던 회원은 지금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교사 뿐 아니라 대학생, 학부모 등 일반인도 많다. 이오덕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오덕 공부 모임’을 통해 이오덕의 책과 삶을 연구하고 있다. 초창기부터 이 단체에서 활동해온 김익승(화양초 교사) 상임이사는 “이오덕 선생은 늘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면서 “선생이 말씀하셨던 ‘참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오덕의 삶과 교육사상> 이라는 책을 낸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이주영(송파초 교사) 사무총장은 “선생은 각종 모임의 회보를 손수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국까지 직접 다녀올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면서 “떨어진 양복을 꿰매 입고 늘 신문지 위에 과일 껍질을 말려서 말려 거름으로 쓰실 만큼 검소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25년간 인연을 맺어온 한길사 김언호 사장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자신의 이론과 정신에 참으로 단호했다. 책 제목 대부분을 직접 지었고, 편집이 조금만 잘못돼도 큰일이 났다. 작은 간행물 하나, 아이들의 편지 하나, 그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말했다.

이오덕은 2003년 충북 충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을 밖에 알리지 말고 장례가 끝난 뒤 ‘즐겁게 돌아갔다’고 전하라”는 말을 아들에게 남겼다. 그가 떠난 곳에서는 그의 이름과 뜻을 이어받은 대안학교 ‘이오덕 학교’가 문을 열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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