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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3>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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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3>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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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4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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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열기로 들떠있던 200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이기도 한 그 때 소장 사회학자 김동춘이 한국전쟁을 다룬 <전쟁과 사회> 를 세상에 내놓았다. 20세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한국전쟁을 분석하고 그것이 한국의 정치ㆍ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도전적으로 질문하는 책이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진행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자유주의적 정권이 들어섰지만, 한국전쟁의 부정적 유산은 깊고도 넓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에 대한 ‘사상검증’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고, 남ㆍ북한군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언론은 북한 군인의 ‘죽음’을 ‘승리’로 미화하기 바빴다.

냉전적 지배 질서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여전히 완고했지만 그것의 원형을 한국전쟁을 통해 세밀하게 들여다본 연구는 당시만해도 전무했다.

기존의 한국전쟁 연구가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 집중했다면 <전쟁과 사회> 는 전쟁 발발 후 국가와 군대, 국민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휴전 이후 남ㆍ북한 사회에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조명함으로써 주목 받았다.

한국 사회의 지배 질서를 관찰하며 적극적인 사회 발언을 하던 김동춘이 한국전쟁으로 시야를 돌린 것은 90년대 초 박사학위논문 <한국사회노동자연구> 을 쓰면서부터다. 사용자가 분규현장에서 노동자를 빨갱이로 낙인 찍거나 구사대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멀리 4ㆍ19, 5ㆍ18 등에서 보여준 군경의 폭력적 진압 혹은 학살과 맥이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원을 찾아가자 한국전쟁을 에두를 수 없었다. 그는 “통상적인 자본주의사회와 달리 당시 한국사회에서 왜 계급정당이 출현하지 못하는지, 왜 노동운동이 취약한지, 왜 시민사회가 활성화하지 않는지 궁금했다”며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 폭력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그것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구명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는 숙제였다”고 설명했다.

김동춘은‘북한군의 남진_한미유엔군의 반격_중국군 참전_휴전’이라는 상투적인 전투사의 틀을 거부하고 본문의 얼개를 ‘피난_점령_학살’3개의 장으로 만들어 학문적 관심이 누구에게 향해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누가 피난을 떠났고 누가 떠나지 못했(혹은 않았)으며, 남은 민중은 점령기의 남ㆍ북한 지배권력을 어떻게 바라봤고, 해방 전만 해도 온순하던 민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잔학한 테러와 학살에 동참하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민중의 전쟁 체험을 해석하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당시 강의를 맡고 있던 성공회대 학생 가족들의 구술보고서, 전북 남원과 경남 거창 등 한국전쟁 당시 이뤄진 학살 피해자들의 인터뷰 등 민중의 구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쟁 과정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북한공산주의 탓이다’라는 식으로 굳어진 한국전쟁 해석 틀에 도전했다. 푸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예속된 앎’에 짓눌린 사람들의 경험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 이후 자신의 고통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던 인민군 피해자와 달리 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자는 그 경험을 발설할 수 없었는데, 긴 세월동안 침묵한 피해자들의 입을 열도록 함으로써 자연스럽게‘한국전쟁은 고통과 피해를 주었지만 모든 한국인들에게 동일한 피해를 준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남한의 극우정치세력과 군수뇌부 지배 엘리트는 전쟁으로 장기간 기득권을 보장받았지만 말단 병사로 전쟁에 참가한 민초 혹은 민중은 전쟁 이후 국가로부터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답게 전쟁을 계급ㆍ계층적 측면에서 바라본 점이 주목을 받는다. 예컨대 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과 잔류민의 성향을 분석하면서 상대적으로 유복한 정부고위관리, 지주, 월남자는 피난을 서둘렀지만 인민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별다른 피해를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중소상인은 방관자적 입장을 보였고 농번기의 농민은 생존을 위해 잔류를 택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20만 명 이상이 숨진 민간인 학살은 가해자중 상당수가 일제시대 하급 경찰을 지낸 가난한 하층민이었는데 지주와 부르주아 출신에 대해 이들이 지녔던 계급적 열등감이 전쟁이 발발하자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한국인의 기회주의적, 순응주의적 태도의 기원을 한국전쟁에서 찾는 점도 설득력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민중을 속이고 먼저 서울을 떠난 뒤, 수복 후에는 잔류할 수 밖에 없었던 민중을 희생양으로 삼은 남한 지배 계급의 태도는 민중으로 하여금‘국가와 권력은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힘센 편에 붙어야 산다’는 순응주의적 태도를 낳았다. 이는 전쟁 후에도 그들에게 계급적 각성 대신 자유당 때는 자유당을, 공화당 때는 공화당을, 민정당 때는 민정당을 찍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점, 전쟁의 내적 측면을 부각하느라 국제정치적 측면을 소략한 점, 지휘관을 비롯해 참전 군인들의 인터뷰가 부족한 점, 이승만에 대한 격한 도덕적 비판 등은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한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의 정치가 아니라 피난을 가야하고 점령당해야 했던 민중이 겪은 후방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발표와 함께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개인들의 ‘압제받은 체험’과‘부인된 기억’을 공공의 장으로 끌어올려 한국전쟁을 재해석하기 위한 근거로 삼았다”며“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다룬 거의 최초의 저술”이라고 평가했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도 “전쟁이라는 무모한 군사적 운동의 주체인 국가와 국가권력 담당자들, 그 기구와 집단들의 ‘병리학’적 본질을 철저하게 드러내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준다”고 상찬했다.

저자는 이 책의 발간을 즈음한 2000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학살 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활동을 주도하며 학살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공론화하려 노력했으며 2005년부터는 해방 후 반민주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등을 밝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그는 “남북화해의 진척 속도 만큼이나 한국전쟁을 둘러싼 시각의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가 한국사회에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다룬 이 책의 2부를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 약력

1959년 경북 영주 출생

1984~1988년 구로고 교사

1993년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1997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및 NGO 학과 교수

2002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상임위원

저서

<한국사회노동자연구> (1991)

<분단과 한국사회> (1997)

<근대의 그늘> <전쟁과 사회> (2000)

<미국의 엔진> (2004)

<열린 사회와 21세기> (2006)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2007)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한국전쟁 다룬 책들

관변학자를 중심으로 호전적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이뤄졌던 한국전쟁 연구에 충격을 준 저술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986)이다.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전제 하에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물었던 커밍스의 수정주의는 한동안 학계를 풍미했지만, 소련해체 후 소련과 중국의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면서 소장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와 전통주의를 모두 극복하려는 연구가 시도된다.

박명림의 대작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996)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관점을 모두 극복한 대표적인 연구로 꼽힌다.

1990년대 말부터는 전쟁의 기원과 발발, 전개과정에 집중한 기존 연구 영역을 뛰어넘는 연구들이 꽃을 피운다. 전쟁 피해자로서의 민간인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고찰한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 (2000)는 비록 본격적인 학술서는 아니지만 한국전쟁을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접근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여성학,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 연구도 잇따랐다. 구술 청취를 활용한 지역사인 김귀옥의 <정착촌 월남인의 생활경험과 정체성> (1999)과 윤택림의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을 찾아서> (2003), 전쟁 미망인들의 생존방식을 연구한 이임하의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 (2004) 등도 한국전쟁 연구를 풍성하게 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동춘은 “인구 구성에서 전쟁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냉전적 시각이 크게 후퇴했다”며 “민족화합ㆍ평화ㆍ인권에 중심을 두고 한국전쟁의 교훈을 보편화할 수 있는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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