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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9> 사계절출판사의 한국생활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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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29> 사계절출판사의 한국생활사박물관

입력
2007.07.26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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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8월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 일군의 출판인과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계절출판사 강맑실 사장, 신문 형식의 교양역사서 <역사신문> <세계사신문> 을 기획했던 출판기획자 김성환 강응천씨, 배기동 한양대 교수(고고학),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종교학), 고(故) 오주석 연세대 겸임교수(미술사),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민속학), 주용립 연세대 교수(역사학)가 그들.

이들의 목표는 “우리 민족이 100만년 동안 어떤 집에서 잠을 자고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도구로 어떤 노동을 하고 어떤 놀이를 했는지를, 대중독자들에게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물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들의 소망은 <한국생활사박물관> 이라는 기획물로 열매를 맺었다.

선사시대부터 삼국, 발해ㆍ가야, 고려, 조선을 거쳐 20세기 남ㆍ북한까지 우리민족의 생활사를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은 이 모임 이후 1년 만인 2000년 7월 ‘1권 선사생활관’ 와 ‘2권 고조선생활관’ 으로 첫 성과를 냈고 2004년 8월 ‘12권 남ㆍ북한생활관’ 으로 일단락을 맺었다.

기획에만 5년 이상이 소요됐고, 30억원 이상의 막대한 비용이 투자된 이 초대형 시리즈는 1990년대 후반의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탄생했다.

당시 역사학계에서는 지배계급 중심의 왕조사나 정치사를 대신해 기층민중의 생활상을 발굴해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자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출판계에서는 조선 민중의 생활사를 소재로 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같은 책들을 내놓아 학술적 성과에 부응했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고 요약한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조선의 문화적 르네상스기였던 영ㆍ정조 연간을 다룬 <영조와 정조의 나라> 등 교양역사서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생활사박물관> 이라는 ‘블록버스터 급’ 기획의 토대가 됐다. “박물관은 옛날의 것, 이미 죽은 것을 전시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을 찾는 까닭은 옛날이 있기에 오늘이 있고 죽은 것들 모두를 토양 삼아 현재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물관이 전시하는 ‘옛날’ 은 살아있어야 한다”는 첫 권의 서문은 그 지향점을 보여준다.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는 것처럼 꾸며져있다. 각 권은 각 시대를 상징하는 사진을 편집한 프롤로그 격인 ‘야외전시장’, 시대별 생활사를 텍스트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보여주는 ‘주전시실’,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그 시대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상체험실’, 심화학습코너 격인 ‘특강실’, 당대 세계의 변화와 우리 역사를 비교체험할 수 있는 ‘국제실’로 구성돼 있다.

평이한 서술방식을 지양하려는 이색적인 시도도 눈길을 끈다. ‘11권 조선생활관 3’의 경우 봉건사회가 근대사회로 변모하는 시기의 생활상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족의 역사를 보여준다.

기획자들은 목포 지역의 유력 가문인 김병욱-김성규-김우진 3대의 이야기를 불러오는데 이들은 각각 시골 선비, 개화 관료, 식민지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급변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실감나게 증언한다.

‘6권 발해ㆍ가야관’ 의 도입부에서는 한ㆍ만 국경인 투먼시의 전경,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청소하는 러시아 처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후예로 경북 경산시 남천면에 모여사는 영순 태씨 집안의 사진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책의 주제의식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시각효과를 강조하고 철저한 고증을 중시한 점도 책의 가치를 높인다. 시리즈 전체에 670여점의 그림, 1,740컷의 사진자료가 사용됐다.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텍스트 중심의 편집방식과 달리 이 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우선 결정한 뒤 텍스트의 위치를 정했다.

1~8권의 아트디렉터를 맡았던 김영철씨는 “시각요소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지와 텍스트가 각각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구성했다”며 “고려청자 사진의 비취색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전시관을 다섯번 넘게 오가며 실제 청자를 촬영한 사진과 인쇄본 색상의 대조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집필에 참가했던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 책에 실린 사진 하나 그림 한 컷이 박사논문의 하나”라며 빈틈없는 고증 과정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될 정도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3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 성공도 거뒀다.

그러나 출판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한국생활사박물관> 은 책의 성패 여부가 오로지 저자의 역량에 좌우됐던 기존의 출판 시스템에 충격을 주었고 기획편집의 중요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출판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시리즈에는 편집인, 필자, 내용감수자, 디자인팀, 사진작가 등 연인원 400여명이 참가했다. 학술적 성과를 출판물을 통해 대중에게 연결시켜 주는 전문가집단의 네트워크가 이처럼 방대하게 구성된 것은 전례가 없었다.

이 시리즈 이후 <중국역사박물관> (범우사), <열려라 박물관> (랜덤하우스코리아) 등 역사교양을 공간적으로 구성한 ‘박물관’ 시리즈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출판계의 한 트렌드를 이뤘다.

역사 담당 교사들이 교과서를 다시 쓴 <살아있는 교과서> (휴머니스트) 시리즈 같은 장기기획물의 탄생을 자극하는 계기도 됐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기존 출판계는 학문적 성과를 토대로 대중적인 교양물을 만들었지만 <한국생활사박물관> 은 출판물이 오히려 생활사라는 학문의 역동성을 자극하고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도발적”이라고 평가하고 “ ‘읽는다’고만 여겨지던 책의 기능에서 탈피해 보고 만지는 다양한 감각을 주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21세기 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집인 강응천씨"처음엔 성공 반신반의 청소년 文史哲책 계획"

<한국생활사박물관> 은 수많은 연구자, 사진작가, 편집자, 디자이너들의 재능과 땀의 결정체다. 공(功)도 과(過)도 공동의 몫이겠지만 이 책의 편집인 강응천(44)씨의 이름을 뺀다면 작업은 훨씬 더디고 결과는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공동작업이었던 만큼 왕조사의 흐름을 따르지 말자는 의견,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하자는 의견, 권 수를 30권 정도로 해야 한다는 의견 등 이견도 많았다. "지금도 13, 14권을 만드는 꿈을 꾼다" 는 강씨의 열정과 "꼭 성공시키겠다"는 뚝심이 아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미지수다.

국내 출판계에서 처음 시도된 대형 기획편집인 만큼 강씨 역시 반응에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

그러나 첫 권이 출간된 후 "한국생활사박물관의 개관과 폐관 시간은 몇시냐?"고 묻는, 책을 실제의 박물관으로 착각하기까지 하는 독자의 전화가 잇따르자 그는 성공을 실감했다고 한다.

외국의 출판전문가들조차 "이 정도 높은 수준의 역사교양서는 권당 5,000부만 팔리면 대성공"이라고 말했지만 이 시리즈는 벌써 권당 2만부 이상 판매됐다.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대학에서는 교양교재로 쓰이고, 만화가 등 다른 문화 분야 전문가들이 기본자료로 쓰는 '소스'가 될 정도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강씨는 1980년대 민족주의 중심의 출판문화에서 탈피해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교양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그 결실이 <세계사신문> 에 이어 <한국생활사박물관> 으로 맺어졌고, 그는 탁월한 출판기획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강씨는 8월에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작업을 같이했던 연구자들과 협력해 청소년을 위한 역사ㆍ문학ㆍ철학 등 인문서를 만드는 출판기획집단 '문사철(文史哲)'을 출범할 계획이다.

그는 "출판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케팅 비용이 늘어나 <한국생활사박물관> 같은 대규모 기획이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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