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우리 시대의 명저 50] <33>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알림

[우리 시대의 명저 50] <33>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입력
2007.08.23 00:07
0 0

첫 에세이집 <광대의 경제학> (1989)을 통해 ‘광대’를 자처했던 경제평론가 정운영.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그러나 광대에겐 자유로웠던 왕과 국가를 향한 희롱과 풍자. 자신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전파하고픈 광대의 의지를 가진 그였기에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1990)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경제학의 소명은 하늘의 일을 근심하지 않고 땅 위의 일을 걱정하는 데 있다”고 믿었던 정운영은 자신의 칼럼을 모아 ‘경제학’이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느끼는 민중의 눈을 뜨게 했다. 그는 정ㆍ관계의 소위 ‘높은 이’들이 추진하는 정책, 그들의 행태를 ‘낮은 이’ 즉 민중의 눈높이에서 비판하고자 했다.

“경제학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암호해독에 질려 경제현상과 경제이론, 즉 밥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마저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안내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소망대로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는 1990년대 필독 교양서의 대명사였다. 경제학을 다룬 책으로는 드물게 1997년까지 11쇄나 찍었다.

<광대의 경제학> 이 신문에 발표한 글이 대부분으로 사회현실에 대한 단평을 모은 것이었다면, 잡지에 게재한 글 위주로 선택한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는 논리 전개가 좀 더 상세하고 구체화됐다.

정운영에 따르면 경제학이란 ‘경영학을 공부한 놀부(자본가)’와 ‘의식화를 학습한 흥부(노동자)’가 공존공영하도록 돕는 것이다.

유기적으로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에서 나만 돈을 많이 벌어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경제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경제란 내가 사는 아파트값이 오르거나, 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고 해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운영은 경제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암호를 해독하듯 풀이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를 뒤덮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야말로 진보 논객인 동시에 인본주의자인 그의 성향을 드러내는 말이다.

정운영은 학자이면서, 강단을 벗어나 자신의 배움을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인 언론인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한국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하다 벨기에 루뱅대로 유학, 학부 과정부터 다시 밟아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신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틀을 닦았다. 1986년 학내 문제로 해직당한 후에는 서울대와 고려대 등에서 강의했고, 사망 직전까지도 칼럼을 쓰는 열정을 보였다.

쉽게 풀어 쓰면서도 유려한 정운영의 글의 힘은 독자들을 흡인하면서 그들이 경제학에 대한 두려움을 던져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소설가 이윤기가 정운영의 글을 보면서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초 정운영이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를 구상한 것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대학생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전혀 갖지 않았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강단에서 만난 대학생들이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사적인 논평을 곁들여 해설한 칼럼을 주로 썼다. 이 책도 ‘대학생 J에게 보내는 편지’로 열고 있다. 이 책이 에세이집을 표방하고 있듯, 경제학이 에세이의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 역시 정운영 식 글쓰기의 힘이다.

정운영의 저작은 주로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칼럼집과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저술한 이론서로 크게 나뉜다. <세계 자본주의론> <한국 자본주의론> 등이 대표적인 이론서다. 칼럼집은 <광대의 경제학> 에서 시작해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레테를 위한 비망록> , 그리고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등 유고집까지 모두 9권에 달한다.

칼럼집은 물론 그의 이론서는 경제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벨기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경제학도들의 지식은 일본 또는 영미권의 저작물을 통한 것이 전부였다. 정운영은 프랑스, 독일 등지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사회비판 의식보다는 개인의 문제에 온통 집중되기 시작했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대학생도 당장의 눈앞의 현실에 전전긍긍하는 게 지금 우리네 모습이다. 자연히 1980년대 후반의 시사 문제를 다룬 이 책의 감동이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속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운영이 지적했던 세계화의 폐단이 2000년대인 지금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선각자적 시각에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 진정한 구루(guru)를 찾기 힘든 요즘이다. 정운영의 글이 별처럼 빛나는 이유다.

■ 노랑 띠 박스

1944년 충남 아산 출생

1972년 서울대 경제학과ㆍ대학원

1972년 한국일보 기자

1973년 중앙일보 기자

1981년 벨기에 루뱅대학 경제학박사

1982~86년 한신대 경상학부 교수

1988~99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1996년 언론인클럽 언론상(신문칼럼상) 수상

1999년 MBC TV '100분 토론' 진행

2001년 EBS TV '정운영의 책으로 읽는 세상' 진행

1999~2005년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2000~2005년 중앙일보 논설위원

2005년 9월24일 신장 질환으로 별세

■ 저서

<세계 자본주의론> <한국 자본주의론> <노동가치이론 연구> <자본주의 경제 산책> <광대의 경제학> <피사의 전망대> <레테를 위한 비망록> <신세기 랩소디>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등

■ 아직 못다한 이야기…정운영의 유고

"세계화 시대에 정치적 정직성이니 정책의 공평성이니 하는 덕목들이 말짱 힘 빠진 주장임을 잘 안다… 그럴수록 이 시대에 더욱 절박한 제목이 정치적 정직성이라고 믿는다. 영웅을 본뜬 <영웅본색> 따위로 한 순간이나마 위로를 찾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면, 그것은 너무 삭막하지만 또한 피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2005년 9월 병상에서 부인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써 내려간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 '영웅본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열흘 걸려 완성한 이 칼럼이 중앙일보에 실린 지 17일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경제학이라는 도구로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인본주의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정운영의 에세이집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는 아쉽게도 현재 절판된 상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 칼럼 '영웅본색'을 비롯한 그의 말년의 글이 실린 유고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에 그대로 살아 있다.

지난해 9월 정운영 1주기를 맞아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와 <자본주의 경제 산책> 2권의 유고집이 발간됐다. 전자는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를 비롯한 그의 칼럼집의 맥을 잇는 아홉번째 에세이집이며, 후자는 <노동가치이론 연구> 등 이론서의 맥을 잇는 책이다.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한국사회의 핵심을 냉철하게 꿰뚫는 그의 균형감각이 번득인다. 대북 경제정책과 관련, 정부와 기업의 역할을 짚은 '장삿속과 민족애 사이에'(143쪽) 같은 글이 그렇다.

독일 경제의 위기와 한국의 주5일제 근무를 연결지은 '천당에 연옥의 시련이'(97쪽) 같은 글에서는 변화하는 세계를 주목하며 한국사회의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오랜 기간 좌파 경제학자로 험난한 삶을 살았던 그의 여정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신 하나로 94년을 버틴 폴 스위지의 생애를 다룬 글 '보수든 진보든 진짜이기를'(213쪽)에는 자연스레 그의 인생이 오버랩된다.

이 책에 실린 그의 미완성 원고 '선비'(79쪽)에서 그는 '스스로 정결함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 나는 이 부류에 선비라는 단어를 갖다 놓고 싶다'고 했다. 그의 딸 정유신씨는 이 책 서문에서 "선비의 한 구절을 읽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며 "나에게는 정결함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적었다.

레테의 강 너머에 있는 그에게서 지혜를 구하고 싶을 정도로 정결한 존재가 그리운 2007년 한국 사회. 벌써 정운영의 2주기가 한 달 앞(9월 24일)으로 다가왔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