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지도자들은 국민을 부를 때, 즉 대중연설을 할 때 어떻게 말문을 여는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선언을 보면서 궁금해져 알아 보니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 정치인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국민을 친애하거나 존경하거나 사랑한다.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 시대변화 담긴 정치인 연설
그런데, 시대 변화와 민주화 진전에 따라 연설의 서두는 달라져왔다. 내년이면 정부 수립 60년이 되지만, 대통령이 연설을 통해 국민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실상 4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초대 이승만으로부터 제 4대 윤보선 대통령까지의 취임사는 사람들을 앉혀 놓고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 주는 사랑방 담화식이었다.
국민이 대통령 연설을 통해 처음 호출된 것은 1963년, 제 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때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우국지사처럼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동포들이여!"라고 외쳤다.
김대중을 이기고 영구집권의 길로 치닫던 1971년 7월의 제 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다시 한번 "사랑하는 오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이라고 했다. 이 두 번의 '사랑 연설'을 빼고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을 애용했다.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 장관들도 모두 국민을 친애했다.
'친애하는 국민'의 결정판은 역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1980년 취임사에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이렇게 연설했다. 1988년에 취임한 노태우도 국민을 친애한 것은 같았지만, '본인'이 아니라 '저'로 몸을 낮춘 게 달랐다. 대통령이 '본인'에서 '저'가 된 것은 대단한 변화다. 후임 김영삼은 문민정부를 출범시키고도 연설은 노태우와 같은 수준이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러 비로소 존경과 사랑이 등장한다. 국민의정부니까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애용했다. 그보다 6년 전에
정계은퇴 선언을 할 때 이미 '존경하는 국민', '국민의 하해같은 은혜'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본심이야 어떻든 존경과 사랑을 함께 받으니 기분 나쁠 건 없다.
지금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식의 어투가 공식이 됐다. 이명박 정동영 이인제 등도 후보 수락연설(이 말은 참 우습다!)에서 존경하는 국민을 앞세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가. 연설만으로 보면 그는 국민을 사랑하기보다 존경하는 사람이다. 2003년의 취임사에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 세 번 나오지만 사랑하는 국민이라는 말은 없다. 국군의 날, 여성주간의 연설에는 '친애하는 국군장병 여러분', '친애하는 여성 여러분'이 등장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노사모 총회와 같은 행사에서나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랄 것은 없다. 다만, 존경만 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정을 느끼기 어렵거나 일정한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의 정치행태로 보아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지도자는 국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존경 친애 사랑을 모두 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할 경우 국민은 긴장해야 마땅하다. 따지고 보면 친애는 독재ㆍ지배의 다른 말이며, 존경은 소외, 거리 두기와 동의어다. 제일 좋은 것은 역시 존경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 '국민 사랑'하는 정치인 조심을
박정희 전 대통령은 5ㆍ16쿠데타로 집권한 뒤 처음 대통령이 되면서 사랑한다고 외쳤고, 영구집권을 도모하면서 다시 사랑한다고 국민을 윽박질렀다. 국민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은 지금 막 저지른 일을 눈 감아 달라거나 이제부터 저지를 일을 좀 봐달라는 뜻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이회창 전 총재는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부르며 출마선언을 했지만, 2002년 정계 은퇴 당시에도 같은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번 출마선언에서는 살신성인의 자세를 특히 강조했는데, 사세 여의치 않아 한 달 후나 그 전에 또다시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부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우스운 일이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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