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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6> 서준식 옥중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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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6> 서준식 옥중서한

입력
2007.11.22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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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옥중서한> 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900쪽에 육박하는 두께가 아니라 ‘그 어떤 권력도 개인의 생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신념아래 비전향 장기수로 17년의 수형생활을 감내했던 한 진보적 사상가의 삶에 동참하는 일의 무게 때문이다. 더구나 수인은 ‘사악한 빨갱이’라는 세상의 편견과는 달리 속속들이 살갑고 정답다.

무엇보다 착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는 착하게 살기는 하나 그저 선량한 마음씨와는 구별된다. 타인의 삶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고 가려는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담고 있다.

“사람이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어떤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나 고통도 그 몸이 맛보아야만 머리 쪽에서 하는 생각도 절실해지고 진짜가 된다는 것, … 엄청나게 복잡하고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 세상에서 누구나 가해자가 되지않고 살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저 선량한 마음씨만 가지고서는 안될 것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착해야 하는 것이다.”(1981년 12월 25일 사촌동생 선암에게 준 편지에서)

그래서 <옥중서한> 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천한 장을 인간 존엄에의 의지로 관통한 한 젊은 사상가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삶의 가장 근원적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

서씨가 2002년 펴낸 <서준식 옥중서한> 은 옥중에서 한 달에 3장씩 배급되는 봉제엽서를 빼곡이 채워 가족과 친지에게 보낸 편지 글을 모았다. 폭력적인 군사정권의 비열한 정치공작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한 순정한 영혼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인 사회평론가 고종석씨는 “시대의 을씨년스러움을 인간 존재의 눈부신 고귀함으로 승화시킨 한국어 서간문학의 웅장한 마천루”라고 표현했다.

서씨는 일본 교토에서 나고 자랐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재일동포라는 신분은 서씨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재일 한국인 2세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유 없는 몰매와 차별, 따돌림을 받던 저자는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것만이 ‘재일’의 숙명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한국으로의 ‘가출’이었다.

조국애로 충만한 청년의 눈에 비친 60년대 한국사회는 슬프도록 비참했다. 민족 대신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맨발의 소녀가 구걸을 하고 굶주린 아이들이 신문지를 덮고 노숙하는 비루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법학 대신 사회과학 서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조국의 전모를 알고싶다는 열망은 70년 둘째 형 서승씨와 함께 8일간의 짧은 북한여행을 감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재일동포였던 그에게 한국인이 골수까지 체화한 레드콤플렉스는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활동하고 민단과 조총련계가 결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3선 개헌 반대운동에 직면했던 군사정권에게 이만한 국면 전환용 빌미도 없었다. 서씨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여 앞두고 형 서승과 함께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됐다. 대선에서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다.

서씨는 7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으나 국가권력은 이번엔 보안관찰법이라는 족쇄를 통해 그를 재구속, 10년의 세월을 더 가둬놓았다. 생각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죗값을 다 치르고도 세상으로부터 격리당한 것이다. 글을 배우지 못해 책 이름을 받아 적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다가 감방에 돌아와 시멘트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후회의 눈물을 삼킨 저자가 “출소하면 하루에 꼭 한 시간씩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쳐드리리라”던 다짐은 1차 보호감호 기간 중 어머니의 사망으로 영영 이룰 수 없는 맹세가 됐다.

서씨는 1988년 비전향 장기수로는 최초로 석방되었다. 출소하면 빈민들과 함께 하며 글쓰기를 하겠다던 소박한 꿈은 지난 13일 조작으로 최종 판명난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거치며 시대의 격랑 속에 인권운동가로 수정됐다.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열고 비정규직 장애우 성적소수자 등 인권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서씨는 현재 독일 룰루지역 보쿰시에 거주하고 있다. 인권운동의 범위와 방법론을 놓고 동료들과 갈등을 빚다 3년 전 인권운동사랑방을 탈퇴한 이래 일체의 공식적 활동을 하지않고 있다.

함부르크대학 철학과에 입학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라고 했다. 2004년께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됐던 <옥중서한> 은 다행스럽게도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통해 내달 말 새로운 내용들이 보강돼 재출간된다. 사람답게 산募?것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 '서준식 옥중서한' 재출간하는 채만수·정호영씨"젊은세대에 시대·삶에 대한 인식 일깨우고파"

"말로 진보를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어요. 처음 옥중서한을 읽었을 때, 인간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감탄했지요."

수년 전 절판된 <서준식 옥중서한> 이 노동사회과학연구소(소장 채만수)를 통해 내달 말 재출간된다. 이 연구소 회원인 젊은 출판기획자 정호영씨가 재출간 작업을 총괄하고 서준식씨와는 서울대 법대 68학번 동창으로 40년 지기인 채만수 소장이 다리를 놓았다.

정호영씨는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개인이 희생당하는 부끄러운 역사가 실제 있었고, 또 앞으로도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옥중서한> 의 가치는 20년 전에 쓰여진 글들이지만 여전히 현재성을 갖추고 인간 존엄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판 <옥중서한> 에는 2002년 판에는 누락됐던 편지 15통, 60쪽 분량이 새롭게 첨가된다. 유일하게 가족이 아니면서 장기간에 걸쳐 편지교류를 했던 'P부인'에게 보낸 글들이다. P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부가 사상전향을 유도하기위해 서씨에게 접근시켰던 인물. 채 소장은 "지배계급의 위선에 항거했던 예수를 사랑하지만 보수 기독교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서씨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 기간 중 옥중의 준식과 처음이자 마지막 면회를 했었다는 채 소장은 "9년을 옥중에서 보냈건만 만나자 마자 우리집에서 기르던 강아지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서준식은 다정다감하고 도덕적인 인물이었다"면서 "새로 출간되는 책이 애초의 독자였던 조카들이나 동생들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시대와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개정판은 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서씨가 글에서 인용한 유명 문필가들의 책에 대해서도 꼼꼼히 미주를 달았다.

이성희기자

■ 서준식 연보

1948년 일본 교토 출생

1967년 고교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 법학과 입학

1970년 둘째 형, 서승과 함께 북한 여행

1971년 서승과 함께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됨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판결

1978년 징역 7년 만기와 동시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

1980년 교도 당국의 처우에 항의, 18일 간 단식 투쟁

1987년 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을 요구하며 51일 동안 단식 투쟁

1988년 석방.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전개

1989~1991년 민가협 공동 의장

1991년 6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관련 구속

1991~1993년 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 창립

1993~1995년 전국연합 인권위원장

1996~1997년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

1997년 KNCC 인권상 수상

2004년 인권운동사랑방 탈퇴

2005년 독일 행

2007년 함부르크대 철학과 입학, 현재 독일 보쿰시 거주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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