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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7>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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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47>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입력
2007.12.03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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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제1권이 발간된 <인물과 사상> 의 제호 아래에는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문구가 뚜렷이 박혀있다. <인물과 사상> 의 표지 디자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유독 이 문구는 종간(終刊)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제호 주변에 자리 잡았다. 바로 이 문구야말로 <인물과 사상> 의 존재 이유이고, 그 역할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1인 출판물로 시작된 <인물과 사상> 은 지식인 사회의 ‘성역’인 인물에 대해 ‘금기’였던 실명비판을 다룬 언론매체로서의 의미가 가장 크다. 그동안 집단을 두루뭉술하게 비판하고, 개개 인물에 대한 평가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언론과 지식인 사회를 통렬히 깨우치며 <인물과 사상> 은 탄생했다.

강 교수는 제1권의 머리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언론의 자유는 없다고 못 박으며 “언론기업 이윤추구의 자유로 언론자유가 변질했다. 출판의 언론화야 말로 언론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대형언론과 달리 출판물은 보통사람의 접근이 용이하다. 엘리트만이 독점하는 우리의 언로를 한 명이 출간하는 단행물의 활성화로 좀 더 넓힐 수 있다는 게 강 교수가 <인물과 사상> 을 시작하며 가졌던 신념이다.

장의덕 개마고원 대표는 “<김대중 죽이기> 가 괄목할 만한 반향을 받자 이에 고무된 강 교수가 출판물과 언론매체가 규합된 형태의 저널룩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책의 형태를 띤 1인 미디어는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혁신적인 매체였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인물과 사상> 을 기획했던 90년대 중반에 대해 “ <인물과 사상> 이 처음 나온 10년 전 권력의 통제는 사라졌지만 지식계의 불문율이라든가 금기 같은 습속은 살아있었다”며 “손바닥만큼 좁은 한국 지식계에서 권력 등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한 비판은 맹렬했지만 동업자들 간 실명비판이 어려웠고 이를 바로잡기엔 기존 매체론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고 책을 한두 권 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은 일은 아니었기에 저널룩이라는 방식을 생각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인물과 사상> 1권은 실명비판과 1인 미디어라는 특이함에 힘입어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5만 권의 판매고를 올렸다. 장 대표는 “독자들에게 낯선 책이었기 때문에 과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파이팅 넘치는 이슈 잡지로, 그리고 속보보다는 무르익은 분석과 논평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1권부터 강 교수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신드롬의 허와 실을 가감 없이 지면에 실어 파문을 불렀다. 조순 대안론을 놓고 유시민씨와 벌인 논쟁, 진중권씨와 오갔던 이문옥 논쟁 등 성역을 설정하지 않는 <인물과 사상> 의 집중포화는 신선한 비판문화를 자리 잡게 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반면 ‘지식계의 선데이 서울’이라는 식의 지독한 혹평도 쏟아졌다.

<인물과 사상> 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도토리라도 키를 재는 식의 직접적인 실명비판을 뿌리내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강 교수는 “동종 영역의 내부 비판과 실명 비판을 금기시하는 수위를 낮추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자평했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는 “주제별로 만들어진 기존의 잡지와 달리 인물 위주로 쓰여 상당한 사회적 논쟁들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강준만 교수의 1인 미디어로서의 외형은 25권으로 마감됐고 <인물과 사상> 은 26권부터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김진석 인하대 교수를 편집위원으로 위촉, 3인이 기획하는 미디어로 탈바꿈했다. 인쇄매체의 쇠락과 이에 따른 <인물과 사상> 의 시장위축을 보완하기 위한 변신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권 당 판매 부수가 수천 권에 그치는 등 1인 저널룩은 추락했고 결국 2005년 33권을 끝으로 종간이 선언됐다.

강 교수는 <인물과 사상> 이 8년 만에 종지부를 찍은 것에 대해 “인터넷의 활성화가 종간의 가장 큰 이유라고 보면 된다”고 답했다.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하는 한윤형(아이디 아흐리만)씨는“지성계와 생활세계 간의 간극을 메우려고 노력했지만 <인물과 사상> 은 충분히 지적이지 못했고 또한 순간 순간에 대중의 반(反)지성주의에 부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며 그 한계를 지적했다.

■ 인물과 사상

1997년~2005년 총 33권이 발간됨. 도서출판 개마고원 발행. 강준만 교수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저널룩(저널+북)으로 출판의 언론화를 지향. 발간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부정기 간행물로 대략 분기에 1권 꼴로 출판됨. 주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실명비판을 다룸. 인물과 사상사에서 나오는 월간 <인물과 사상> 과는 다름.

■ 강준만 교수는…양비론 청산한 '죽이기' 시리즈 신선한 충격…토론·논쟁문화 대혁신

1997년 대선 때부터 막강한 비판력으로 무장한 강준만 교수의 글은 국내 정치 판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대중 속에서 싹을 틔워왔다.

<인물과 사상> 에 앞서 90년대 중반 대학생의 필독서로 읽혔던 <김대중 죽이기> , <김영삼 정부와 언론> 등은 그동안 도토리 키재기에 그쳤던 지식인 사회의 양비론적 비판의 틀을 재구성한 역작이었고 강 교수 스스로 그 수 세기를 포기할 정도로 쏟아낸 많은 대중적인 단행본들은 실명비판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일궈냈다.

장의덕 개마고원 대표는 "그의 글쓰기는 지식인의 토론문화를 혁신했다. 토론과 논쟁을 통해 보상과 문책을 유도해내는 과정을 정착한 공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강 교수의 모습은 뜻밖에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다. 글로 일군 그의 정치비판 경험을 생각하면 충분히 TV토론 사회자를 거쳐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일 만도 한데 도통 언론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강 교수는 그 흔한 휴대폰마저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히 기계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운전면허가 없는 그에겐 자전거가 대표적인 운송 수단이다. 그의 가족(아내와 두 딸)이 사용하는 집 전화가 있지만 강 교수와 연락이 닿기는 힘들다. 공적인 대화는 오직 그의 집필실에 놓인 팩시밀리와 제한된 이메일로만 가능하다.

<인물과 사상> 의 편집위원을 지낸 김진석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는 "책을 만드는 동안 직접 강 교수를 만난 적은 없고 오직 글로만 대화를 나눴다"고 말할 정도이다. 한 번은 강 교수의 자칭 팬들이 그를 KBS 사장으로 위촉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 교수는 "실망이다. 내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들이 나를 아직 모르나"라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초면인 사람에겐 마치 은둔자처럼 보일 정도인 강 교수의 이와 같은 모습은 실명비판을 통해 만든 수많은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분석도 있다. 강 교수가 '원격 비판'을 한다고 꼬집는 이도 있다. 하지만 외부와 일정 정도 스스로를 격리하는 모습은 철저한 자기관리의 방법일 뿐이라는 게 지인들의 설명이다.

<김대중 죽이기> 부터 강 교수와 인연을 쌓아온 장 대표는 "다작을 쏟아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만들려고 외부와 떨어져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가장 즐거운 오락이라고 말하는 강 교수에게 이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따가운 비판과 논쟁을 즐기는 강 교수는 오만하고 불손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많다. 하지만 그는 "내가 일흔 살이 되어도 스무 살 젊은이의 비판에 대해 성실하게 답할 것"이라고 말하며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 학생들에게도 겸손하며 거칠지 않다. 장 대표는 "오히려 주변인들에게 말치레가 좋다. 딸들에게도 반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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