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이언스 에세이] 이공계 노비(奴婢)
알림

[사이언스 에세이] 이공계 노비(奴婢)

입력
2008.05.26 00:22
0 0

1만 원짜리 지폐를 보면 앞에는 세종대왕이, 뒤에는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혼천의가 나온다. 강남에 있는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에는 장영실의 동상이 있다. 그는 노비였는데 재주가 좋아서 제법 출세했다가 나중에는 왕족이 타는 가마가 부서졌다고 곤장을 맞고 쫓겨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람이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삼백 오십년 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친척 형을 따라가며 기행문 <열하일기> 를 쓴다. 거기에는 사신 일행 중에서 중국어를 가장 유창하게 하는 득룡(得龍)이가 몇 번 나오는데 벼슬은 중군(中軍)을 지냈고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한데 아무리 읽어봐도 득룡이는 노비로 보이는 것이 박지원은 그를 시종일관 득룡이라 적고, 득룡이의 성씨가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열하일기> 에서 인상적인 것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먼저 득룡이의 가족을 감금했고 그래서 그는 사신이 간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중군이며 가선대부니 하는 것들은 모두 종놈한테 던져주는 종이쪼가리였던 것이다.

다시 이백 이십년 뒤 한국에는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흔히 이공계 노비 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가끔 언론에 나오는 “15조원 짜리 기술 해외로 유출될 뻔” 하는, 그런데 사용하는 것이다. 범죄의 단계를 그림 그리기로 비유하자면 종이에 물감을 칠하기는 했으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미수, 붓과 물감만 챙겨둔 예비, 그림을 그리자고 둘이서 말로만 한 음모가 있다.

미수인 경우에도 처벌한다는 조항이 따로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범죄단체 조직 미수도 처벌 받지 않는다. 하물며 예비나 음모는 살인, 강도, 내란 같은 대단히 특별한 경우에만 처벌조항이 있다. 하지만 위에 나오는 15조원 어쩌고 하는 경우에는 예비도 음모도 모두 처벌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다른 회사로 옮기자고 회사동료와 이야기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으며 상사가 회사서류 가지고 집에 가서 일해 오라면 지시사항을 녹음해 둬야 안전하다는 뜻이다.

한데 진짜로 그런 기술이 있다면 당장 승진시켜 주고, 월급은 세 배 쯤 올려주고, 집에 데리고 가서 사위 삼으려는 생각은 왜 안 할까. 감방에 보내겠다고 협박해서 직장을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이백년 전 득룡이의 가족을 감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행스럽게도 연구원들은 21세기 마녀사냥에서 대부분 무죄를 선고 받는데 이것을 생각해보자. 회사가 특허출원을 하기나 했을까?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나 했을까? 주식가격은 왜 몇 십 배로 뛰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론 플레이로 소액투자자를 속이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천억 원 규모도 안 되는 회사가 이공계 노비 법을 등에 업고 15조원 어쩌고 하는 뻥을 친다면 우리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만화가 최가야(최씨?)의 작품에 홍길동전을 패러디한 공(工)길동전이 있다. 볼수록 씁쓸한 이 만화는 “길동은 이과(理科)였다”부터 시작한다. 홍길동은 집을 나가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었던 한(恨)을 토로하지만 공길동은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겠다” 하며 떠난다. 부당한 취급을 받으면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 할 때에야 한국의 이공계는 비로소 정당한 자기 몫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상근 과학기술원 수학과 교수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