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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3> 그리스 세계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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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3> 그리스 세계가요제

입력
2009.01.2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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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칠레 세계가요제와 그리스 세계가요제의 사무국에서 동시에 초청장이 왔다. 6월에 칠레에서 열리는 가요제에 참가하고 뒤이어서 7월초에 그리스로 가는 일정이다.

비행기 표는 물론, 모든 경비를 주최 측이 부담하는 여행이다. "이게 웬 행운인가?" 작곡가 이봉조씨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쓸데없이 농담하는 줄 알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내 코앞에다 비행기 표를 들이대는 데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봉조는 작곡가 자격으로, 현미는 가수로서, 나는 가요제의 심사위원으로 각각 초청을 받았다. 우리는 매우 흥분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이 있어도 해외여행이 전혀 자유스럽지 못하던 시절인데 돈 한 푼 안들이고 그 멀리 여행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칠레와 그리스에 대한 공부도 다시 하고, 여행할 때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고 있을 때 실망스런 소식이 들어왔다. 칠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바뀌었고 가요제도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칠레는 포기하고 그리스로 곧장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는 우리나라와 그리스가 국교는 맺고 있었지만, 양국에 서로 대사관이 없었고 명예영사가 비자를 발급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테네까지 직항으로 10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그 때는 무려 26시간 이상 걸렸다. 그것도 중간에서 하루를 자야 하는 아주 불편한 여정이다. 동경으로 가서 SAS, 즉 스칸디나비아 항공으로 바꿔 타고 필리핀에 내려서 주유를 하고, 인도의 뉴델리에 기착했다가 이란의 테헤란에서 하루를 자야 한다.

그런데 여기 테헤란에서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가져온 짐들을 전부 통관 시켜서 밖으로 가지고 나간 다음에 다음날 떠날 때 다시 통관을 거쳐 비행기에 실으라는 것이다. 보세구역에 보관하면 될 걸 뭣 때문에 번거롭게 하느냐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이건 큰일이다. 짐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봉조와 현미 두 사람 짐만 해도 큰 가방으로 5개나 되고 내 짐이 하나 있으니 이건 완전히 이삿짐 수준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테헤란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거쳐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스에는 그 당시 한국인이 오직 한명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장(한국이름은 장려상)인데 한국전쟁 때 참전한 그리스 군인과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그리스 여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과 나이가 같아서 금세 친해졌고 그 후로도 가깝게 지냈다. 가요제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는 우리를 아주 많이 도와 주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최고급인 그랜드브레타뉴 호텔에 투숙했는데 이봉조씨가 가지고 온 짐 보따리를 보고 나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닫혔다. 자기의 악기인 테너 색소폰이나 오케스트라 멤버에게 나눠 줄 악보의 부피도 대단했으나 그보다 더 질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깡통 김치다. 요새는 플라스틱 용기에 간편하게 포장돼있지만 그 때는 어디 그런가. 깡통이다. 그나마 다른 반찬은 없고 오직 김치만 캔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김치 없으면 죽는 사람이거든"라고 하면서 그는 씩 웃었다. 한 끼에 깡통 하나씩 따서 먹겠다면서 그 무거운 걸 30개나 짐 속에 꾸려 가지고 왔으니 의지의 한국인이다.

하지만 이건 계산 착오였다. 어디 입이 자기 하나인가? 현미도 있고 나도 있다. 그리고 하루 늦게 우리와 합류한 TBC-TV의 황정태 부장도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안 먹으면 되지만 옆에서 냄새가 나는데 김치를 안 먹을 수는 없다.

30개의 캔이 3일 만에 10개로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봉조에게는 심각한 일이다. 그날 이후 이봉조 이외는 깡통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 날부터 연습에 들어갔다. 주최 측이 준비한 반주 오케스트라는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봉조ㆍ현미 팀이 만들어 온 노래는 '나의 별'이다. 그리스 말로 일부를 부르기로 하고 번역을 부탁했다. 제목은 'Asteri Mu'였다. 이 노래는 훗날 서울에서 '별'이란 제목으로 취입이 되었다.

7월 8일, 드디어 가요제 막이 오르는 날이다. 장소는 아테네 시내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올림픽 스타디움. 그라운드에까지 의자를 놓아서 어림잡아 10만 명 정도의 관객이 차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준비해 가지고간 하얀색 턱시도를 입었는데 주최측 안내대로 심사위원석으로 가니까 ABC순으로 Korea 좌석이 맨 가운데에 있고 각 위원들 앞에 자기나라 국기가 놓여 있었다. 태극기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퉁퉁 치는 느낌을 받았다.

내 왼쪽에는 요르단(Jordan) 대표, 그 옆으로 일본의 하토리 료이치(유명한 작곡가), 내 오른쪽에는 레바논 대표가 앉았다. 대회장안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라디오 중계방蒡??열두 개가 있었다. 사회자가 심사위원을 소개했다. 위원 중에는 Three Coins in the Fountain을 만든 새미 칸도 있었고, 레이 카니프가 위원장을 맡았다.

한국 대표 차례다. 이봉조가 나와서 반주 악단을 향해 지휘봉을 들자 화려한 한복을 입은 현미가 등장, 큰 절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가슴이 퉁퉁 거렸지만 현미도 무척 떨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무대에 섰던 그녀인데도 목소리가 가물거렸다. 그러나 역시 관록이 중요하다. 얼마 안 가서 곧 자기 페이스를 찾고 노래를 시원스럽게 해냈다.

자, 이제부터는 내가 활약할 차례다. 예선이 끝나고 심사위원들이 모여서 각자 평을 하고 투표를 했는데, 큰 일이 났다. 투표 결과 현미는 가창상을 받았지만 '나의 별'이란 노래는 10위 안에 들지 못했다. 나는 강력히 항의를 했다.

10위 안에 어떤 나라의 노래는 두 곡이나 뽑으면서 11번째로 표를 많이 받은 한국 노래를 제외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을 했다. 두 곡이 들어간 나라의 노래를 하나 빼내든지 아니면 11곡을 입상 곡으로 하자고 위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11곡을 모두 입상 곡으로 하는데 성공했다.

이봉조씨와 나는 그날 밤에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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