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해 이를 악무는 그들의 희생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의 희망이 끔찍하게 눈물겨웠다. 나는 절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왜 저들에게만 주어진 걸까."(128쪽)
김이설(34)씨의 첫 장편소설 <나쁜 피> (민음사 발행)에는 가족이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불행의 원천 그 자체인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가득하다. 나쁜>
소설의 화자는 서른다섯 살 노처녀 화숙. 정신지체자로 동네 사내들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둔 그녀는 엄마를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둔 외삼촌의 딸 수연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외삼촌과 화숙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연이 택하는 방식은 '모성'의 포기다.
수연은 정식 결혼에서 낳은 딸 혜주를 옆집 친구에게 맡긴 채 옛 애인 재현과 딴 살림을 차린다. 불행한 운명의 고리란 얼마나 지독한 것일까. 화숙은 수연의 유일한 존재근거인 재현을 유혹하지 못해 안달하고, 수연은 끝내 고층아파트에서 몸을 던진다.
노숙자 소녀가 겪는 궁핍, 타락한 삶에의 유혹 등을 적나라하게 형상화한 단편 '열세 살'(2006)로 등단한 작가 김씨는 <나쁜 피> 에서도 불행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들의 절망을 고통스럽게 그려낸다. 나쁜>
'불행한 운명의 전시장'이라는 문학평론가 백지은씨의 분석처럼 극단적으로 설정된 김씨 소설 작중인물들의 가족사적 내력은, 팍팍해진 21세기의 현실에서 '가족'이 위안처로서 결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전략의 하나로 여겨진다.
김씨는 "가족을 밀쳐버릴 수도 동떨어질 수도 없는 것, 그런 식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인 것 같다. 타인보다도 때로는 더 상처를 주는 가족의 이야기, 그 문제적 개인들의 이야기를 더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