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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8> 조피 숄 -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여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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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8> 조피 숄 -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여자의 죽음

입력
2009.08.2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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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쯤 전 대학 시절에 읽은 책 가운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者)의 죽음> (잉게 숄 지음ㆍ박종서 옮김)이라는 게 있었다. 원제가 '흰 장미'(Die Weisse Rose)인 이 책은 당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혔다.

시대 탓이 컸을 것이다. 저자 잉게 숄이 제 여동생 조피 숄과 남동생 한스 숄의 반(反)나치 저항운동을 회고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폭압적 분위기와 맥놀이를 만들어내며 젊은이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새겼다.

'종신대통령' 박정희는 '총통' 히틀러와 포개졌고,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겁 많은 영혼들에게 부끄러움을 불러 일으켰다.

저자가 책 전반부에서 회고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가족사와 '백장미' 그룹의 활동이다. '백장미'는 조피와 한스, 그리고 한스의 친구들이 뮌헨대학 교정과 시내에 뿌려댄 반파쇼 팜플렛의 '저자'다. 조피와 그 동료들의 공동 필명이었던 셈이다. 책의 후반부는 이들의 체포와 재판과 처형, 그리고 함부르크로 퍼져나간 '백장미' 조직, 백장미 팸플릿들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어찌 보면 조피와 그 동료들이 한 일이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무장해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반나치 운동 단체들과의 연대 속에서 나치 독일의 전투력을 손상시킨 것도 아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히틀러 체제에 반대해야 한다는 취지의 '삐라'를 뿌린 것뿐이었다. 조피는 이것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인정했다. 그들의 저항은 철저히 비폭력적이었다. 그러나 나치 시절엔 그 '소극적 저항'마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어린 한스가 히틀러 유겐트 단원이었듯, 어린 조피도 독일 소녀단의 단원이었다. 뮌헨의과대 학생이었던 한스가 잠시 러시아 전선에 참전했듯, 뮌헨대학 철학도(哲學徒) 조피도 입학 전후로 여러 차례 '노력동원'을 겪어야 했다.

학생이면서 군인인, 또는 학생이면서 노동자인 생활을 하면서, 이들 오누이는 조국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전선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나치의 만행을 목격한 한스는 더 이상 제 '야만스러운' 조국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백장미라는 저항그룹을 만들었다. 한스는 세 살 터울 누이동생 조피에게 이 일을 숨기고 그녀를 연루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함께 사는 오빠 일을 조피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조피가 백장미의 일원이 된 다음, 그룹의 '모터'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열성적이었고, 지혜로웠다. 친위대의 눈길을 피하기에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았다.

뮌헨의 백장미는 여섯 번째 '삐라'를 뿌린 뒤 모두 체포되었다. 그 삐라들은 침묵하며 나찌에 동조하던 독일인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고, 나라 바깥까지 퍼져 나갔다.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조국의 패전을 바랄 수밖에 없었던 이 젊은이들의 고뇌가 그 삐라 속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피는 제 '소극적 저항'의 질료를 믿음에서 찾았다. 그녀 일기의 한 부분은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시대를 종말의 시대로 믿고 있다. 이 모든 끔찍한 징조들이 그렇게 믿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한 번이라도 이 시대에 살았다면, 영원히 이 시대와 함께 묶여 생각될 사람으로서,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신에게 해명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내일도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폭탄 한 개가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죽는다면 내 죄는 적잖이 클 것이다. 마치 죽으면서 이 땅덩어리도 함께 파괴한 것만큼이나 말이다. 나는 오늘날 경건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자취를 좇아가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고작 칼부림과 같은 수치스런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한 듯이… 나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신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존재만을 위한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 중에 조피가 한 말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올바른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올바름 넘치는 세상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날씨는 화창한데 나는 간다.

그러나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가. 얼마나 젊고 희망에 찬 생명이… 만약 우리가 한 행동이 많은 사람을 깨우쳤다면, 지금 죽는다고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의 마지막 장을 이루는 '백장미의 편지'는 20대 청년들이 썼다고 보기엔 상당히 원숙하다. 고대 현인들의 문장을 인용해 그것을 당대 나치시대의 문맥에 끼워 넣으며, 역사와 철학의 이런저런 개념들로 직조해낸 그들의 선언문은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 난무했던 반-파쇼 선언문들과 비교해도 한결 격조 있다.

그것은 이 삐라들에 선동성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히틀러 팸플릿의 선동성을 백장미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중화시키며 막아내려 했던 걸까?

반면에 당시의 소위 '신문'이라는 것들은 오늘날의 파시스트들이 봐도 창피할 정도의 문장들을 담고 있었다. '저주는 우리의 기도요, 승리가 우리의 보수다',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해도 우리는 더 전진하리라', 이런 헤드라인 밑에는 굵고 시뻘건 밑줄이 그어져 마치 노여움에 부푼 핏줄 같이 보였다고 잉게 숄은 회상한다.

2003년 독일 텔레비전 ZDF는 전국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독일인 10명을 뽑게 했다. 조피 숄은 오빠 한스와 함께 4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바흐, 괴테, 구텐베르크, 비스마르크, 빌리 브란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보다 앞자리였다. 40대 이하 젊은 시청자들의 의견만 취합했다면 숄 오누이가 1위에 올랐을 것이다.

숄 오누이의 명성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의 많은 학교와 거리와 공원에 숄 오누이의 이름이 붙었다. 그것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그 남매는 이데올로기가 갈라놓은 그들의 두 조국이 함께 경배할 수 있는 투사였다. 그들의 처형 10주기였던 1953년 2월22일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가 뮌헨과 베를린의 대학생들에게 추도사를 보냈다.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독일 영혼의 절규가 역사를 통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며, 죽음마저도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 따라서 독일의 비극 속에 뛰어든 그들의 행동은 권력에 대한 무모한 반항이 아니라,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로서 파악되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ZDF가 숄 오누이를 독일 역사상 네 번째로 중요한 독일인으로 뽑기 몇 해 전, 여성 잡지 브리기테 매거진은 조피 숄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았다. 이 잡지의 주요 독자들이 젊고 진취적인 '아방가르드' 여성들이었는데도, 조피 숄은 전임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가수 마돈나를 가볍게 제쳤다.

물론 저널리즘 편집자들이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다시 말해 '인기투표')에 큰 뜻을 둘 것은 없겠으나, ZDF와 브리기테 매거진이 조피 숄에게 보낸 경의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싸운 대상은 역사상 가장 괴물 같은 체제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책들이 숄 남매와 백장미 그룹에 대해 씌어졌고, 2005년에는 그녀의 삶을 조명한 영화도 나왔다.

'조피 숄_그 마지막 나날들'(Sophie Scholl_Die letzten Tage)이 그것이다. 율리아 옌츠가 타이틀 롤을 맡은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로 노미네이트되었고, 율리아 옌츠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 여우상을 받았다.

백장미 그룹에서 숄 남매의 이름이 크게 부각된 것은 그들의 언니이자 누이인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덕이 크다. 그 책은 아무래도 동기를 향한 잉게 숄의 의초에 휘둘렸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뮌헨 백장미 사건으로 처형당한 또 다른 피고, 라기보다는, 자유의 투사들의 이름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쿠르트 후버(그는 백장미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교수였다. 조피는 그에게 철학과 신학 강의를 들었다), 빌리 그라프, 흐리스토프 프롭스트, 알렉산더 슈모렐….

상투적 말이지만, 자유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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