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체코 수도 프라하시. 바츨라프 광장은 눈이 내리는 침울한 날씨였지만 광장 분위기는 들떴다. 관광객은 기마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광장 끝 크리스마스를 위해 마련된 상설시장에는 인파로 붐볐다. 20년 전 체코 국민 수십만명이 모여 종 대신 열쇠꾸러미를 흔들며 공산주의와 작별을 고했던 이곳은 이제 맥도널드 두 곳, 카지노 세 개와 더불어 외국계 호텔, 각종 다국적기업 광고판이 차지하고 있었다. 700여m 거리 양쪽 곳곳에 있는 환전소는 '벨벳혁명' 중심지였던 이곳이 관광지로 변모했음을 짐작케 했다.
1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심부 중앙역 인근 높이 234m인 문화과학궁전. 공산주의 체제 때만 하더라도 유일한 고층빌딩이었던 이 건물 주변에는 이제 다국적기업 및 호텔 등 150m 이상 대형 건물 4동이 들어섰다. 스탈린이 1952년 선물한 궁전을 체제 전환 후 무너뜨리자는 논란이 일었지만 대신 다른 건물로 가리자고 결론이 났다. 인근에는 2012년 유로컵 대회 준비를 위해 한창 건설 중인 건물도 여럿 눈에 띄었다. 크이자스카 거리 과거 공산당사는 이제 자본주의 상징인 증권거래소로 탈바꿈했다.
20일 오후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도나우강 동쪽 페스트에 위치한 대형 백화점 '웨스트엔드'. 크리스마스를 5일 앞둔 이곳은 쇼핑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북적댔다. 10여년 전 개장한 이 곳은 헝가리에 명실상부한 쇼핑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구 소련 블록에 묶였던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중부유럽국가는 체제전환을 비교적 성공한 나라들로 꼽힌다. 백화점과 슈퍼마켓에서는 많은 물건이 있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상시적이다. 하지만 체제 변화에 대한 불만은 여기저기서 표출됐다. 11월 슬로바키아 여론조사기관 이보(IVO)가 자국 포함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4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체제 변환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 답변은 47%에 불과했다.
특히 공산주의 체제가 몸에 벤 중장년 층은 "옛날이 더 좋았다"고까지 말한다. 바르샤바 택시운전사 에드바르드 헤트케(60)씨는 "그 때는 아무도 굶어 죽지 않았다. 실업자도, 집 없는 사람도, 휴지통을 뒤지는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같은 사람은 살아있기에 살고 있다"며 "민주화가 나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부다페스트 텔렉 산드로(54)씨도 "체제 변화는 자유를 줬다지만 돈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며 "돈과 능력 없는 사람에게 자유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화와 자본주의를 체화한 젊은 세대에겐 지금은 새로운 기회다.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학문 영역도 넓어진 탓이다. 체코인 프란지섹 스베비시(25) 씨는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고 말했다. 헝가리인 피터 타르자니(26)씨는 "외국기업이 많이 들어와 있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며 "직장을 위해 서유럽으로 나가는 친구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얻은 것은 여행자유, 열린 시장 그리고 실업
프라하에서 만난 슈테바코바 나탈리에(17ㆍ여) 양은 공산주의를 모른다. 민주화된 체코만이 그가 경험한 전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구해 여행을 자주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체제 전환 뒤 가장 나아진 게 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과거 여권은 국가 귀속물이었고 여행은 정부 허가였다. 폴란드인 포테이소 테레사(63ㆍ여)씨는 "여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점,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도 갈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좋아졌다"고 단언했다. 정부가 분배한 쿠폰으로 물건을 구입하던 소비문화 변화도 격세지감이다. 폴란드 루치나 지엥바(24ㆍ여)씨는 "슈퍼에서는 구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각종 백화점, 할인마트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20년 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장면들이다.
하지만 이런 풍족함은 온전히 자기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경쟁이 원칙인 자본주의에서 나타난부익부빈익빈 현상은 세대, 지역,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했다. 헝가리인 모더라스 기요르기(68)씨는 "정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룰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우리를 내던졌다"며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공산주의 시대 때 상상하지도 못했던 실업은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됐다. 폴란드 그단스크시 안제이 제고르스키(56)씨는 "지금은 실업이 가장 문제로 민주화에 기대하지 않았던 점"이라고 밝혔다. 3국 모두 실업률이 10%를 내외에 이른다. 특히 헝가리의 경우 일부 지역은 실업률이 40%가 넘으며, 총 실업자 중 1년 이상 장기 실업자도 2009년 7월 현재 42.6%에 달한다.
Goodbye 러시아, Hello 서유럽
지난 1999년, 3국은 공통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ㆍNATO)에 가입했다. 1955년 나토를 대항에 소련이 만든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적에 합류한 상징적인 일이었다. 폴란드에서 문화과학궁전을 무너뜨리자는 여론도 냉전 즉 구 소련과 단절을 의미한다.
중부유럽은 러시아와 단절하고 시선을 서유럽화 쪽으로 돌렸다. 여행 자유를 누린 국민들은 국경을 넘어 선진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를 직접 목격했다. 제2외국어로 러시아어를 강요받던 교육은 이제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선택폭이 넓어졌다.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어디서든 구직도 가능하다. 러시아의 부재에서 서유럽 자본은 구세주였다. 복지 또한 공산국가와 비교해도 손색 없다.
때문에 이들 국가의 지향점이자 모델은 서유럽이 됐다. 헝가리 외교관 출신 판돌라 요세프(60)씨는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일 때부터 서유럽 국가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서유럽식 국가로 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 호텔에서 일하는 막달레나 루빈스카(26ㆍ여)씨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서유럽 국가와 궤를 맞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라하, 바르샤바, 그단스크, 부다페스트=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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