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교도소에서 장기수들과 함께 지내면서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이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인간적 연민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품을 많이 구매해서 주기도 하고, 주부식이나 운동 등 재소자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교도소장에게 건의해서 4등식을 3등식으로 올렸는데, 이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창문의 철망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그야말로 치밀한 전략이 필요했다. 먼저 교도관들을 설득해야 했다. 철망 설치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철망을 제거하더라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점을 설득했다.
그러나 설득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투쟁도 보통 투쟁이 아니라 생명을 건 투쟁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나는 통일당 간부였던 유허정이란 사람이 출소하기 3일 전에 단식투쟁을 시작해서, 그가 출소해 구속자 가족들과 재야인사들에게 연락해서 대구교도소로 항의방문을 오게 했다.
단식투쟁 5일째 되는 날 구속자 가족과 재야인사 약 50명이 대구교도소로 와서 재소자 처우 문제로 단식까지 하게 한 교도소 당국에 항의하면서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단식투쟁 10일째가 되는 날 교도소장이 나를 불러 철망을 제거하는 대신 방과 방 사이의 벽돌담을 30㎝ 정도 더 달겠다고 했다. 결국 철망 제거투쟁은 승리한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투쟁으로 재소자 처우 개선투쟁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된 데는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도록 도와준 교도관들의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사방 담당들도 우리를 도와줬지만 특히 우리 사동을 책임지고 있던 박 주임이란 분이 우리를 많이 도와줬다. 어쩌면 그 분이 있었기에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박 주임은 경주에서 버스로 출퇴근하는 분이었는데, 출퇴근하는 4시간이 자기에게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말할 만큼 인생을 관조하면서 사는 분이었다. 무척 정의로워 우리의 요구가 합리적인 한 관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 단식투쟁이 끝나고서 곧바로 재소자 폭행문제가 대두하여 또 다시 단식투쟁을 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 투쟁을 주도한 우리 시국사범들은 또다시 전국 교도소로 분산 이감됐는데, 나는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아무튼 대구교도소에 있은 약 7개월 동안 50일 정도 단식을 했으니 재소자 처우 개선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알 수 있다. 건강상의 고려는 전혀 없이 거듭된 단식과 복식 등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정말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룬 데서 오는 보람과 기쁨이 컸다.
그런데 나는 재소자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교도관 처우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교도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아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없는 한 재소자 또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도관의 낮은 월급도 문제였지만 열악한 근무환경과 근무조건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근로기준법과 공무원 복무규정, 그리고 다른 직종 공무원들의 근무조건 등에 비추어 교도관 처우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정리해서 교도소장이나 교정 당국에 건의한 일이 많았다. 1990년대 들어 교도관처우가 크게 개선됐는데, 내가 건의한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대구교도소에 있는 동안 있었던 일 가운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으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다. 음력으로 1978년 4월 9일 교무과장이 불러 갔더니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통보해줬다.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한 것 같으나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곧바로 내 방으로 왔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무엇보다 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출세를 한들, 이름을 날려본들 자랑할 곳이 없으니 모든 삶이 의미가 없어졌다. 출세를 꿈꾸거나 유명해지는 것에 집착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느닷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사회운동의 동기가 부모형제의 고난에 찬 삶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부모형제들 걱정시키는 일이나 해왔는데, 마치 어머니를 위해 살아온 듯이 어머니가 죽고 없으면 더 살 필요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머니를 너무 고생시킨 것도 가슴 아팠지만 효도될 만한 일을 한 가지도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무엇보다 1977년 12월 21일 그 매섭도록 추운 날 여든 두 살의 나이에 죽기 전 막내아들 얼굴이나 한번 보겠다고 예순이 넘은 두 분 형수와 함께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와서 고생했을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졌다. 연세가 들면 소변도 자주 보는데 그 먼 길?어떻게 다녀갔을까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일만 가슴 아픈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집에 가면 잠잘 때 어머니 젖을 만지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곤 했는데 이제 집에 가더라도 잠잘 때 만질 어머니의 젖이 없으니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싶었다.
그리고 아침에 해가 뜰 때면 해를 향해 막내아들이 잘 되기를 축원하신 그 기도의 힘으로 건강하게 내 나름의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 어머니의 그 기도가 없어지게 됐으니 무슨 힘으로 살아갈까도 싶었다.
영화인 한갑진이 '우리 어머니처럼 살면 무엇이 두려우랴'에서 시련을 이겨낸 힘의 원천으로 어머니의 삶을 밝혔던데, 정말이지 세상 사람들이 우리 어머니처럼 착하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싶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대단히 총명했다. 일자무식이면서도 회심곡이나 사친가 등 긴 가사들을 거침없이 외웠는데, 그 총명함이 착하고 맑은 마음에서 온 것 같아 더욱더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 지금도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볼 때면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걱정, 어머니의 기도가 내게 큰 힘이 됨을 느끼니, 어머니의 힘은 참으로 큼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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