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앞에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단지 올해로 벌써 30년이 되었다. 30년이란 세월은 칼바람처럼 아린 기억들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런 고즈넉한 여유를 나에게 돌려주었다.
예전에 쌓아 두었던 글들이 생각나 다시 꺼내 읽어보니 그 세월 안에는 항상 새로운 것들에 목말라하면서 내 안에 수없이 많은 생각과 가치들을 토해내며 나를 던졌던 시기도 있었고, 아직도 알 수 없는 내 정체성과 그리고 지금은 그 대상마저도 불분명한 옛 사랑歌도 담겨 있었다. 몸부림치는 감성에 나를 적셨던 그 때의 일들은 깊은 한숨 속에 나를 다시 추억하게 만들고 있다.
우연히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국제복장학원이 내 30년의 주인이 되었다. 신문에 난 주소를 들고 찾아간 학원은 내가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남산 길에 있어 어쩌면 무언의 끈으로 나를 계속 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종일 디자인, 패턴, 일러스트 3개 반을 들으면서 학원에서 보냈다. 과제가 많아 하루는 집에 들고 올 수 밖에 없었고, 밤늦게 바느질하는 모습을 어머니께 들키고 말았다. 내가 의상 하는 것을 모르셨던 어머니는 나를 본 후 말없이 방으로 들어 가셨다.
어머니께서는 분명히 방안에서 소리 없이 울고 계셨으리라. 외아들로 키우면서 부엌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셨던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복장학원을 마친 나는 그 해 처음 개설된, 지금의 대학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국제패션디자인 연구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복장학원에서 기능적인 능력을 배웠다면 연구원에서는 패션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젊은 연구원 친구들과 밤이면 맥주잔을 기울이며 패션의 예술과 상업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나에게는 숙제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연구원을 졸업하고 어느 대기업에 면접을 보러 갔다. 그날 나는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면접을 봤는데 면접관은 못마땅한 얼굴로 어떻게 면접을 보면서 노타이에 캐주얼한 복장으로 올 수가 있냐며 나를 힐책했고, 대기업에 대한 환상이 깨진 나는 그 뒤 중소 브랜드의 업체만 지원하게 되었다.
이후 몇 개의 기성복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중앙콘테스트에 입상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복장학원 출신의 모임인 국제디자이너클럽(KDC)에서 주관한 연말자선쇼에 신인디자이너로 뽑혀 처음으로 패션쇼를 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내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듬 해, 디자이너로 일한 지 5년 만에 드디어 이상봉이라는 이름으로 명동 제일백화점에 매장을 열면서 본격적인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디자이너 양산의 산실이었던 중앙디자인클럽을 통해 매년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패션쇼를 하면서 패션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있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상봉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중앙디자인클럽에서 활동하다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SFAA(스파)에 가입해 컬렉션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스파 컬렉션에 '퍼포먼스'라는 것을 도입하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나에게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보여 주고 싶었고 지금도 결코 후회는 없다. 컬렉션의 테마였던 탄생을 표현하기 위해 이불씨가 퍼포먼스를 했다.
남자와 여자모델의 머리를 밀고 남자의 머리에는 하늘 천(天)을 여자의 머리에는 땅 지(地)자를 그려 넣고 가슴에는 고추를 주렁주렁 달아 내가 생각한 탄생을 표현하고자 했다.
내 쇼는 대부분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내가 연출한 가장 행위적인 쇼는 죽산국제예술제에서 선보인 패션 퍼포먼스와 홍대 앞 녹색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의 오프닝 퍼포먼스를 꼽을 수 있다.
산속 중턱 나무 사이에 걸린 달빛아래 육모초를 모기향 삼아 벌인 의식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퍼포먼스였다. 당시 테마는 태(胎)로, 무대에는 9개의 큰 항아리 속에 물을 담고 형광염료를 넣어 하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춤을 추며 항아리 밖으로 나왔을 때 흰 옷들이 형형색색으로 물들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홍대 갤리리에서는 하재봉의 시집 <발전소> 를 소재로 한 조각가 고경호씨의 전시 오프닝 퍼포먼스였다. 미라처럼 감긴 남자와 누드의 여자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자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끈이 풀리면서 남자는 누드가 되고 남자가 입은 옷은 여자에게로 옮겨져 드레스가 되는 그런 퍼포먼스였다. 발전소>
사람들은 패션을 옷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패션은 상업적인 옷만은 아니다. 패션의 매력은 산업과 예술의 조화에 있다고 나?누누이 말해 왔다. 내 안에 있는 수없이 많은 생각들과 가치들이 부딪히고 존재하고, 깨어지고 사라지면서 나와 패션은 그렇게 30년이란 세월을 부둥켜안고 살아왔다. 백 번이 넘는 패션쇼를 해왔지만 난 지금도 쇼를 앞두고 악몽과 싸우고 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지금, 패션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작업은 끝까지 계속될 것 같다. 부족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행운이 따라 주었고, 그 행운을 만들어 준 많은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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