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3> 긴 피신생활이 시작되다
알림

[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3> 긴 피신생활이 시작되다

입력
2010.02.07 23:10
0 0

1980년 5월 18일. 세상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무장군인이 거리마다 지키고 있어 꼼짝달싹 할 수 없기도 했지만 설사 계엄당국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거나 시위를 벌여도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으니 쥐 죽은 듯 조용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자 광주에서 민주화투쟁이 일어났는데 죽은 사람까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신문도 방송도 약간의 소요사태가 있었다고만 보도할 뿐 상세한 내용은 일체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투쟁을 지속하기로 계획한 바에 따라 집회를 갖기로 했다. 서울역 근방 후암동 시장통과 영등포 연흥극장 앞 등지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100 명도 모이지 않아 집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집회를 시작하자마자 무장군인들이 들이닥쳐 준비한 유인물을 뿌리고는 도망가기가 바빴다.

그런데 다음날 광주에서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차별 폭행하면서 '유방을 도려냈다'는 등의 소문들이 나돌았고, 무엇보다 광주시민 수천 명이 살해되어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는 거였다. '광주사태'로 불렸던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내용이 그때는 극비사항이었다. 우리 몇몇은 광주로 가려고 했으나 갈 수가 없었다.

차가 중간에 차단되어 광주까지 갈 수 없다는 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광주사태'는 엄청난 분노와 자괴감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세상에 이런 야만이 있을 수 있나!' '이렇게 당하고도 꼼짝할 수가 없다니!'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5.17쿠데타'나 '광주사태' 등과 관련하여 언론이 얼마나 무보도나 왜곡보도를 일삼았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중요 사실일수록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 보도했다가 십 수 년이 지난 후 민주화가 되고서 그 사건을 '비화'라는 이름으로 대문짝만하게 보도해서 '장사'하는 것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직무유기' 사건을 뒤늦게 보도하면서도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은 하나의 희극이었다!

나는 5.17쿠데타가 일어나고서 피신할 곳을 마련해야 했다. 평소 운동의 방향과 관련하여 많은 의미 있는 조언을 들어왔던 김정남 선배에게 피신할 곳을 부탁했다. 김 선배는 김한림 여사를 통해 캐나다 선교사인 어느 할머니 집을 소개했다.

신촌 근방 5층 아파트였는데, 피신만 하기에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김대중씨 구명이나 '광주사태' 등과 관련한 글을 써서 김한림 어머니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는 등 매일같이 해야 할 일이 있었던 나로서는 드나들기가 너무 어려워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열흘 정도 그 집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

바쁘게 설친다고 해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터에 '그 할머니 집에 갇혀서 책이나 읽고 지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기도 하나,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수배자 명단이 발표됐는데, 내 이름이 맨 앞에 나왔다. 이래저래 미운 털이 박혔겠으니 당연했지만, 특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내란음모'사건이 되는 데 내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처럼 수사기관이 파악하고 있어 그렇게 된 것도 같았다. 그리고 심지어 '도망 다니는 데 선수라 체포가 어려우면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말도 있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나를 체포하기 위한 수사기관의 노력은 실로 엄청났다. 가령 동창생의 경우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음은 물론 전화 한 통 주고받은 일이 없어도 전원 조사를 받았고, 심지어 경찰서 단위까지 '장기표 체포전담반'이 구성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로 말미암아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불의의 곤욕을 치른 분들이 너무나 많은데, 미안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런데 5월 20일경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 영천의 산동네에 있는 서울 문리대의 신금호 집에서 모임을 갖고 골목길을 따라 대로를 향해 내려오는데, 대로가 아직 상당히 먼데도 전경 두 명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나와는 30m 정도 거리였다. 일단 멈춰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수첩을 뒤적이며 무언가 찾는 척하다가 바로 앞에 있는 가게로 들어가 담배 한 갑을 사서는 왔던 방향으로 몇 발짝 걸어 나와서는 '다리야 날 살려라'하며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설사 전경들이 나를 뒤쫓는다 하더라도 잡을 수 없을 만큼.

전경이 상시적으로 길거리에 배치되어 검문검색을 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나 또한 위기를 맞은 때가 많았는데, 3년여 동안 체포되지 않고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도망을 잘 다녀서라기보다 '운' 때문이었다.

캐나다 할머니 집에서 나온 나는 전병용씨의 처 조카사위인 서원열씨 집에 가 있게 됐다. 전병용씨는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많은 도움을 준 분으로 김정남 선배와도 가까웠다. 그런데 서원열씨 부부는 세 살짜리 아들에 갓난아기까지 네 식구였는데, 방이 두 개이긴 하나 작은 방은 한 사람 눕기도 힘들어 그 집에서 계속 함께 살 수는 없었다.

그런 데다 나의 경우 20여년을 징역 아니면 수배생활을 한 터라 평생 아내와 함께 살 날이 별로 없겠다 싶어 아내도 나와 함께 피신생활을 하기 위해 이미 집을 나와 있었다.

이런 사정을 전병용씨 부부한테 말했더니 자기 처 조카사위로 하여금 우리 부부도 함께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구하게 했다. 그래서 서울 신정동에 방 두 개짜리 연립주택을 구했는데, 비록 셋집이지만 독립세대라 피신중인 우리로서는 천국과 같았다.

서원열씨 부부가 천사 같은 사람들이라 지내기가 너무 편했고, 특히 그 부인(재명 엄마)이 끓인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집을 세 얻기 위해 전병용씨 부인(세민 엄마)이 그 더운 여름날 신정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흘린 땀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기 그지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