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권에 밉보이면 5년 고생이지만 원청기업 눈 밖 나면 도산"
5일 경기 안산의 반월ㆍ시화 산업단지. 주로 제조업의 2, 3차 하도급 업체들이 몰려있는 이 곳은 지난 해에 비해 다소 활기를 되찾은 듯 했다. 제품과 원자재를 실은 트럭이 분주히 도로를 오갔고, 공장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품 상자 등을 나르는 근로자들도 바빠 보였다.
하지만 업체들의 실상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최근 들어 대기업 주문량도 늘었고 공장 가동률도 평년 수준으로 회복됐지만 하도급 업체들은 열심히 일해 봐야 별다른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A업체 대표는 "요즘 대기업은 원가절감 차원에서 공장가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철저히 계산해 납품단가를 제시한다"며 "대기업이 책상에 앉아 계산한 수치는 기계가 한번도 쉬지 않고 돌아갔을 때를 가정한 것으로,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기계 고장도 생길 수 있고,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원자재의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급등하는데 이를 반영한 납품가를 받으려면 적어도 3~4개월은 어렵게 대기업을 설득해야 겨우 몇 퍼센트 반영해 준다. 그는 "대기업이 주는 납품단가로 공장을 운영하면 오히려 적자를 보는 경우도 있어 요즘은 정부보다 더 무서운 게 원청기업"이라며 '밉보여도 정권 5년이야 참으면 되지만 원청 대기업 눈밖에 나면 아예 문을 닫는다'는 동료 기업인의 말을 상기시켰다.
지난해 경기불황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대기업은 요즘 사상 최대의 이익을 기록하는 등 호황을 맞고 있지만 중소기업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경기 안산의 반월ㆍ시화 산업단지, 인천 남동 산업단지 등에 모여있는 2, 3차 하도급 업체들은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를 낮춰 큰 이익을 내는 대기업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어깨에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경기 안산 반월ㆍ시화 산업단지에서 자동차 부품 업체를 운영하는 B 대표는 수도권에 제 2공장을 지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2년 전 부지를 내놨다. 5년 전 1차 협력업체 대여섯 개가 무너지며 떠안게 된 10억여원의 빚과 지난 해 경제위기 와중에 빌려 쓴 은행 부채 등을 갚기 위해서다. 지난 해엔 살고있던 아파트도 팔았다. 하지만 제 2공장 부지는 아직까지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
이 업체는 최근 대기업 몰래 새 제품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해서는 이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새 제품으로 틈새 시장을 공략하거나 직접 해외시장을 개척하려 한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임에도 연구소를 만들고 연구진까지 고용했다. 이 업체가 이 같은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은 쓰라린 과거 경험 때문이다. 자체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B 대표는 "힘들게 기술을 개발하면 대기업이 하도급 관계를 이용해 적은 돈으로 손쉽게 기술을 사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석대식 인천 남동산업단지 경영자협의회 사무국장은 "최근 들어 산업단지 내 공장 가동률은 77~78% 수준으로, 경제위기 이전 수준에 근접했지만 중소 규모의 하청업체들은 여전히 자금난, 인력난 등에 시달리고 있다"며 "업체의 생산증가가 수입증가로 연결되지 않아 중소기업 대표들의 속은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강희경기자
■ 하도급업체의 비애
대기업들의 눈부신 성과에는 하도급 업체의 비애가 숨어있다. 대기업이 계열사에는 부가가치가 높은 하청을 몰아주고 비계열사에는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도 납품단가조차 올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도급 업체의 눈물로 대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수요를 독점하고 있어 하도급 업체들은 어디에 대고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다.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이후 이 같은 대기업의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대부분 대기업들이 원가를 정해 놓고 납품을 받는 이른바 목표원가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선철, 고철 등 원부자재 가격이 불과 몇 달 사이 30%씩 올랐지만 대기업들은 납품단가 인상은커녕 되려 내리라고 요구했다. 일부 하도급 업체는 부실한 재료를 쓰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자동차 핸들을 만드는 한 하도급업체 이모 사장은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어 취성(외부 충격시 부러지는 정도)이 약한 소재를 썼는데 혹시 안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면서도 "그렇게까지 했지만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경기 김포시의 한 기계 부품사 사장 A씨는 "원자재 가격이 올라서 납품 기업에 찾아가면 담당자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라며 "원청과 하청업체간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 관계"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제식구 감싸기식 차별도 심각하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완성차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현대ㆍ기아차의 경우 지난해 상반기 계열 부품사의 평균 영업이익은 600억원이 넘었다. 하지만 비계열 부품사의 경우 그 10%도 안 되는 수 십억원대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생산성이 낮은 이유는 대기업이 부가가치가 낮은 품목을 떠넘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비계열 하도급 부품사들은 경영 상황의 외부 노출을 꺼려하고 있다. 불만을 표출하는 것으로 비춰질 경우 그나마 있던 일감도 끊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팀장은 "소형 부품사에 대한 경영 실태는 기초조사조차 없는 게 현실"이라며 "불합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하도급업체간 폐쇄적인 관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 분쟁조정 겪은 기업 35% "괘씸죄로 보복성 불이익"
주로 대기업인 원(原)사업자를 상대로 하도급 분쟁조정을 신청한 기업의 35%는 분쟁 조정 후 '보복성'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 하도급분쟁조정위원회(하도급위원회)가 납품 대금 미지급, 일방적 계약 파기 등의 이유로 조정 신청을 한 83개 업체에 대해 2008년 12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분쟁 조정이 끝난 후 원사업자와 거래를 계속 유지하느냐는 질문에 고작 4개 업체(4.8%)만이'그렇다'고 답했다. 분쟁조정협의회에 신고 했다는 이유로 원사업자가 거래를 끊거나(18개, 21.7%), 원사업자가 아무 설명 없이 거래처를 바꾼 경우(11개, 13.3%) 등 35%가 '괘씸죄'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원사업자의 횡포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거래를 스스로 포기(33개, 39.8%)하거나 거래처를 바꾼 경우(6개, 7.2%)도 무려 47%나 됐다. 하도급위원회는 주로 대기업과 이들에게 납품을 하는 중소 하도급업체 사이에 하도급분쟁조정을 위해 중소기업중앙회가 설치한 기구이다.
심지어 24개 회사(29%)는 조정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불이익을 당했고 그로 인해 영업 상태가 매우 나빠졌다고 답했다. 하도급 업체들이 당한 불이익의 유형을 보면 '조정 신청 후 일방적으로 거래처를 바꿨다'는 응답이 가장 많아 15개 회사(62.5%)에 달했다. 이어 '원사업자가 주문량을 줄였다'(8.3%), '원사업자가 의도적으로 사업을 방해했다'(8.3%), '다른 거래 업체와 차별 대우를 당했다'(8.3%), 기타(12.5%) 등이 뒤를 이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52%는 거래 단절이 걱정돼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그냥 참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라며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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