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야구해설 '1번지' 하일성(61)씨가 매주 월요일 그의 인생과 야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서울 환일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1979년 오관영 동양방송(TBC) 배구해설위원의 권유로 방송에 입문한 그는 야구 해설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얻고 있습니다.
그는 2006년 한국야구위원회(KBO)사무총장에 발탁돼 3년간 한국야구의 실무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2009년 KBO 퇴직 후 다시 마이크 앞으로 돌아온 하일성씨. 그의 막걸리처럼 구수한 목소리가 지면을 통해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해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이순(耳順)을 넘기고 보니 인생이라는 것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나면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에는 그 문제 때문에 밤새 고민하고, 마치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모든 것은 과정일 뿐 결과는 아니다. 나와 비슷한 조건에서 자라는 청소년들,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는 가장들에게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승부는 계속된다. 누구도 인생의 실패자나 패배자는 아니다. 늘 역전 가능성이 있는 게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첫째도 둘째도 가정이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며 자랐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가정은 깨져서는 안 되며,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무슨 말로도 변명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 가족간에 다툼이 있을지라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극단적인 상황만은 피할 수 있다.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들이 결혼도, 이혼도 쉽게 하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나는 1949년 2월18일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훗날 장군까지 되셨지만, 내가 태어날 때는 중령이었다. 어머니는 이른바 신식여성으로 미도파백화점에서 장사를 하셨다. 당시로서는 귀한 외제 물건을 판매하는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영화배우 등 유명인들과 교제가 활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릴 때 나는 집에서 '황동'으로 불렸다. 어른들은 그렇게 불러야 오래 산다고 했다. 부모님도 나를 일성이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세대만 해도 호적상 이름과 집안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나는 지금도 옛추억을 떠올리고 싶으면 혼자 "황동아"라고 불러본다. 그러면 골목길에서 함께 뛰놀았던 어릴 적 친구들이 손을 흔들 것만 같다. 황동이는 또 다른 하일성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체가 가난에 허덕였다. 학교에 가면 점심을 거르는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내가 다니던 종로초등학교는 서울 한복판에 있어서 비교적 형편들이 좋았지만 그래도 점심을 먹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색깔별로 일곱 벌이나 준비해놓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내게는 형제가 없었다. 그래서 친가나 외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공부도 제법 했기에 학교에 가는 것도 늘 즐거웠다. 공부 잘하는 부잣집 외아들, 선생님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행복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두 분 다 배울 만큼 배운 인텔리들이라 격하게 싸우지는 않았지만 다툼 횟수는 점차 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면 나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 때가 많았다.
결국 두 분은 얼마 후 헤어지게 됐다.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이던 나는 졸지에 결손가정의 불행한 아이가 돼버렸다. 설마 하던 어린아이에게 부모님의 이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내 행복은 끝이었다.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된 나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부대를 따라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했기 때문에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혼 후 평소 알고 지내던 분과 재혼했다. 나도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분이 새 아버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새 아버지와 함께 산 적은 없었다. 어머니와 새 아버지는 재혼 후 외국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얼마 후 재혼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부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나는 외가에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외가에서의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얼마 후에는 친구네 집에서 지냈고, 또 얼마 후에는 학교 선생님 댁에서 먹고 자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또다시 친구네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잦은 거처 변경. 나는 자연스럽게 말수가 적어졌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수업시간에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볼 때가 많았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럴수록 친구들은 내게 많은 걸 물어왔다.
"너 어머니 있어?"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쇳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고,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도 흘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거처를 자주 옮기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친구들이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 부모님이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비쳐질까 걱정했다. 그래서 외톨이를 자청했다.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친구네 집으로 떠나기 전날 밤, 내 짐을 꾸려주시던 외할머니는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셨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나도 너무 슬펐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나는 대여섯 군데의 집을 거쳐 다니면서 지냈다. 그때 눈칫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러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대광중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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