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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4> 군 입대 후 사고 치고 전쟁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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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4> 군 입대 후 사고 치고 전쟁터로

입력
2010.11.07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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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야구 특기생으로 경희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 후 얼마 안 돼서 야구를 사실상 그만뒀다. 고등학교 때부터 야구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나보다 야구를 잘하는 선수가 훨씬 많았다. ‘야구로 성공할 수 있겠다’는 목표가 사라지자 야구에 대한 애착도 없어졌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나는 술과 가까워졌다. 고등학교 때처럼 눈치 볼 필요도 없게 됐으니 매일 부어라 마셔라 했다. 몸이 부실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몸으로 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몸이 안 되는 상태에서 하기 싫은 야구를 하다 보니 걸핏하면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훈련을 게을리 한 탓에 조금만 달려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갈수록 야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딴짓’을 했다. 감독님의 눈을 피해 학교 숲 속으로 도망가서 낮잠을 자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감독님이나 선배들한테 들키면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실컷 맞아야 했다.

대회에 나가면 1학년들은 주로 선배들의 장비를 챙겨 주고 물을 떠다 주는 게 일이었다. 어차피 나도 선배가 되면 대접을 받을 텐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런 일이 싫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는 야구부를 피해 도망 다녔다. 강의가 끝나면 잽싸게 교문 밖으로 달려가 일반 친구들과 어울렸다. 돈이 없는 날에는 하숙집에 드러누워 공상에 잠기는 게 일이었다. 예쁜 아내와 오순도순 사는 게 내 공상의 주된 테마였다.

나는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아무라도 내 하숙집을 찾아 주면 무척 반가웠다. 집이 먼 친구들은 내 방에서 진을 치기도 했다. 하숙집 주인아줌마한테 눈치를 받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인심 좋은 시절이라 친구들의 밥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즐거운 하숙집 생활과 달리 학교 생활은 갑갑하기만 했다. 공부는 뜻대로 안 됐고, 시위 때문에 툭하면 휴강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공부할 수 있는 의욕도 분위기도 안 됐다.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군대라도 다녀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나 혼자 입대를 결정했다. 당시 병역법상으로 나는 독자였기 때문에 면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자원 입대했다. 배웅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나 혼자 머리 깎고 군에 입대했다. 오랜만에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인한 충격, 불량 학생으로 지냈던 중고 시절, 건달 대학생 생활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군대가 도피처가 되진 못했다. 워낙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군대의 엄격한 규율이 내겐 도무지 맞지 않았다. 군복 냄새조차 싫었다. 정말 탈영까지 하고 싶을 정도였다.

첫 휴가 때 나는 ‘사고’를 쳤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후 급기야 패싸움에까지 휘말렸다. 결국 여러 명이 부상한 큰 싸움으로 번지는 바람에 경찰서까지 가야 했다.

우리들은 현장에서 붙잡혔고, 나는 경찰서에 이어 곧바로 군 헌병대로 넘겨졌다. 황금 같은 휴가를 다 써보지도 못한 채 영창에 갇히고 말았다. 영창에 갇히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영창에 간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일병 하일성, 나와!” 내 이름을 부르는 헌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헌병은 나를 헌병대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돼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사병 범죄자가 헌병대장실까지 갈 일은 없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와 계셨다. 수갑에 두 손이 묶인 나를 보시고 아버지는 말 없이 긴 한숨만 내쉬셨다.

“이 녀석아 이게 무슨 꼴이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외롭고 힘들어도 너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나이가 되지 않았니?”

아버지는 돌아가면서 내 손을 꼭 잡아줬다. 나는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서 잘 가시라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신 후 헌병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야 인마, 아버님이 그렇게 높은 분이시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네 아버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작살날 뻔했어. 알아?”

아버지의 ‘빽’으로 나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백한 범죄를 없는 일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대신 베트남으로 가야 했다.

베트남행이 결정된 후 4주간 실전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훈련 동안 나는 전쟁터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떳떳하게 살아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물론 전쟁터에서 나는 죽지 않았지만 ‘떳떳함’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게 됐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백마부대원이었던 나는 환송식이 시작되자 형언할 수 없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버지가 환송식을 지휘하는 환송단장이셨다.

아버지는 베트남으로 떠나는 장병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무운장구를 빌었다. 장병들의 가족은 눈물 범벅이 됐지만 나를 배웅하러 나 온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뒤 열차가 떠나려는데 누군가 나를 찾았다. 아버지의 부관장교였다. 그 장교를 따라가 보니 아버지는 기관차 옆에 서 있었다. “일성아,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아버지는 난생 처음 보는 미국 달러 5장(20달러짜리)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이 돈은 아주 위험할 때만 써라. 베트콩한테 잡히면 괜히 목숨 내놓고 싸우지 말고 영리하게 행동해라. 이 돈이 통할 때도 있을 거다. 용감하게 싸우다 와라.”

열차로 돌아온 나는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고뭉치로 지냈던 학창시절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내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느꼈다. 몇 번이고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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