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못했던 아내의 씩씩함 덕에 '결혼 홈런'인숙 생각에 애태우다 졸업식 후 용기내어 청혼완고히 반대하던 장인, 딸에게 "네 뜻을 밝혀봐라"내성적인 그녀가 또렷이 "네" 답하자 결국 승낙
"아아, 그러세요. 저번에 아이들 데리고 서울 창경원에 다녀오신 그 선생님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인숙 어머니, 아니 장모님과의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였다.
그러자 함께 있던 동료 교사들은 농담을 해댔다. "그 집에 하 선생님과 나이가 맞는 딸이 없어서 그렇지, 있다면 이만한 사윗감도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결국 그 이야기는 나이만 틀렸을 뿐, 현실이 됐다.
인숙 어머니가 식당 일을 다 보고 나갈 즈음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인숙 어머니를 뒤따라가면서 말을 꺼냈다. "저 인숙 어머니, 인숙이 시집 보내실 거죠?" "그럼요, 다 큰 딸을 왜 데리고 살겠어요." "그러면 저한테 보내시지요." 인숙 어머니는 내 말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세요."
인숙 어머니, 아니 장모님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내 말을 전적으로 농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다짜고짜 어린 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데 진담으로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모님을 만난 뒤로 인숙에 대한 내 사랑은 더 뜨거워졌다. 아침에 일어나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도, 학교에 출근해도, 밥을 먹어도, 수업시간에도 온통 인숙이 생각뿐이었다.
인숙이는 더 이상 내게 제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용기가 없었다. 그저 애만 태울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서 '그러면 안 되지. 선생이 어떻게 졸업도 안 한 제자에게 연정을 느낄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성이 감정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인숙이 때문에 애만 태우던 나는 기회를 잡았다. 인숙이가 예비고사를 치르기 위해 인천으로 가게 됐는데, 내가 안내를 자청했다. 나는 그 전에 서울까지 가서 예쁜 장갑을 샀다. 인숙에게 줄 선물이었다.
시험 치르는 날이 됐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 인숙에게 손짓을 했다. "많이 춥지?" "네." "시험 잘 치를 자신 있니?" 인숙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는 인숙에게 예쁘게 포장된 장갑을 내밀었다. 인숙은 포장지를 뜯지는 않았지만 내용물을 아는 것 같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인숙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서 인숙의 집에 찾아갔다. "계십니까?" 인숙 어머니는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이고 선생님이 저희 집에 다 오시고. 자 어서 들어오세요."
인숙도 마루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인숙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도 않았다. 인숙은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인숙 어머니가 안내하는 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인숙 아버지(장인 어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인숙 아버지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하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인숙 아버지는 강하게 말렸지만 나는 무릎 꿇은 채로 입을 열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인숙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네? 서, 서, 선생님, 인숙이는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어요. 그 어린애가 어떻게 시집을 간단 말입니까? 허허." 인숙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쳐다봤지만 인숙 어머니는 나를 거들고 나섰다. "이 시골바닥에서 어떻게 하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
하지만 인숙 아버지의 태도는 완강했다. "선생님이 우리 인숙이를 귀여워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나이를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도 인숙이를 막내처럼 아껴주세요."
'하일성 청혼 사건'은 삽시간에 동네에 쫙 퍼졌다. "제가 중매 서 드릴까요?"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여동생이 있는데 한 번 만나 보실래요?" 중매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민망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나를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보다 따뜻하게 나를 대했다. 동네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숙이가 학교를 졸업한 지 며칠 뒤였다. 나는 인숙이를 서울로 불러내 함께 식사한 뒤 다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을 마주한 채 인숙이를 바라보던 나는 정식으로 청혼했다. "인숙아, 나랑 결혼하자."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던 인숙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러면 3년만 기다려 주세요." "3년? 석 달도 못 기다리겠는데 3년이라고? 그건 안 되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인숙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선생님하고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근데 그렇게 말하면 자존심 상할까 봐 아무 뜻 없이 3년이라고 했어요."
인숙을 서울에서 만난 지 일주일쯤 지난 후 인숙이 동생의 하숙집으로 갔다. 인숙이 아버지가 나를 그곳으로 부른 것이다. 방 안에는 인숙이 부모님과 인숙이 세 사람이 있었다.
"하 선생, 인숙이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 이 자리에서 확인해 봅시다. 결혼은 부모가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인숙아, 너도 하 선생과 결혼하고 싶니?" "…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네 뜻을 정확하게 밝혀 봐." "네!" 인숙이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나를 포함한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내성적인 인숙이가 부모님 앞에서 그렇게 '씩씩하게' 대답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허허, 우리 인숙이 다 컸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결혼해라!" 인숙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숙 아버지는 화끈하게 결혼을 승낙했다. 나는 세상을 모두 얻은 듯이 기뻤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1975년 6월2일 약혼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30일 서울 신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니까 인숙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덟 달 만에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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