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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누명 벗은 조봉암선생 유족 표정/ "비워둔 비문, 반세기 만에 새길 수 있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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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누명 벗은 조봉암선생 유족 표정/ "비워둔 비문, 반세기 만에 새길 수 있게 돼"

입력
2011.01.2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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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비문(碑文)을 새길 수 있게 됐네요."

죽산 조봉암이 '사법살인'을 당한 지 5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죽산의 큰 딸 조호정(83)씨는 한 맺힌 과거에 대한 회한을 공란으로 비워뒀던 묘비에 아버지의 비문을 써넣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서울 망우리묘원에 있는 죽산의 비석은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라고만 쓰여 있을 뿐, 좌우 뒷면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에 건국의 주역. 죽산이 대한민국에 남긴 공적만으로 비석 하나는 가득 채울 수 있겠지만 유족들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는 그날을 위해 비문을 공란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지난 50여년간 죽산의 네 자녀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연좌제에 묶여 정권의 감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호정씨의 남편 고 이봉래(1998년 작고) 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도 생전에 수시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신세였다. 호정씨 사위 유수현(59)씨는 "영화감독이었던 장인이 복잡한 서울에서 헤어지지 말자며 시골 사람들끼리 밧줄로 묶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경찰들이 갑자기 연행해갔다"며 "정부에 대한 항의 표현이라는 게 이유였다"고 말했다. 연좌제의 족쇄는 죽산의 외아들에게 더욱 심했다. 유족들은 "죽산의 아들을 받아주는 회사가 없어 직장만 스무 번 넘게 옮겨 다녔다"고 말했다.

이번 재심 선고가 있기 전까지 유족들의 명예회복 노력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 숱한 진정과 탄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91년 당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의원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 86명이 '죽산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 등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회 파행으로 법안이 폐기돼 한 가닥 희망마저 물거품이 됐다. 유씨는 "50년 가까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명예회복을 도울 법과 제도가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며 "할 수 있는 건 죽산의 재평가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족들의 진정을 받은 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 사건에 대해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재심 무죄 선고도 진실화해위가 진상규명의 물꼬를 터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날 대법원 법정에 나온 조씨는 선고 뒤 기자들을 만나 "아침까지도 불안했는데 이렇게 좋은 날이 오리라고 생각 못했다"며 "내가 죽어서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죽산은 사형 집행 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이승만)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유족들의 바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조씨는 재심 선고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밉다는 이유로 정적을 이렇게 없애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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