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쯤 전일 겁니다. 식도락 제대로 즐기고 싶어서 하이텔 천리안 기웃거리던 시절이었죠. 한마디로 다들 얕더군요. 수소문 끝에 제대로 한다는 한 동아리를 찾아갔는데, 거긴 거의 무협지 수준이었어요.
(광어 회를 한 점 시식하더니) '이건 어분사료를 쓴 게 아니라 육분 사료를 쓴 것 같다'
(젓가락으로 회를 집어 햇볕에 비춰보며) '모세혈관이 여기저기 막힌 걸 봐선…'
장난 아니냐고요? 얼마나 진지했는데요! 정말 그런 경지가 있는 건지, 초보 회원 놀리려고 장난친 건지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그런 분들과 어울리면서 실력을 쌓았어요.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어울려선 안 늘지만 고수들과 놀면 금세 늘잖아요."
어쨌건 그는, 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그 아득한 내공의 도반(道伴)들과 함께 꼬박 10년을 연공(硏攻), 온라인 음식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파워블로거가 됐고,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한국블로그산업협회가 제정한 2009 한국블로그어워드 우수상(취미여가부문) 초대 수상자가 됐다. 야후 블로거 박태순씨. 그의 블로그'gundown의 食遊記(kr.blog.yahoo.com/igundown)'에는 하루 평균 약 2만 명의 손님이 들르고, 어떨 땐 10만 명씩도 몰려든다. 요컨대 그는 식당과 음식에 관한 한 아주 성능 좋은 마이크를 지니고 있다.
-원래 취미가 그쪽이었나.
"그렇다. 감각은 타고난다지만 부모님 덕택에 어릴 적부터 충실히 개발된 영향도 있다. 부모님이 맛난 걸 즐기셨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훈련과 학습이다. 좋은 맛을 찾아 매주 스무 군데씩 식당을 엄선해 순회하던 때도 있었다. 요즘은 일(생업)이 바빠서 주 3,4회 정도 다닌다."
-힘들 때도 있겠다.
"안 먹고 사는 사람 있나. 내가 다른 게 있다면 음식을 좀 까다롭게 고르고 좀 먼 길도 마다 않고 다니는 정도다. 처한 여건에서 최상의 음식을 선택해서 즐기는 게 식도락 아닌가? 탐닉하면 힘들지만 즐기면 즐겁다."
-돈과 시간이 없어 원하는 걸 못 먹을 때도 있을 텐데.
"다금바리 먹겠다고 제주도 못 가면 안달하는 사람이라면 힘들 거다. 하지만 고급 재료, 비싸고 귀한 음식…, 그거 고집하는 건 탐닉이다. 식도락은 삶에 음식을 얹는 것이지, 음식에 삶을 종속시키는 것은 아니다. 바빠서, 혹은 없어서, 햄버거 외에 대안이 없다면 최고의 햄버거를 고르는 것, 그게 식도락이다."
5분여 동안 이어진 그의 햄버거론은 거의 강의수준이었다.
"A사의 패티는 껍질 내장 섞어 간 최하급 살코기에 소스로 맛을 낸 거고, 제대로 된 패티 맛, 불 맛을 보려면 B사로 가야 한다. 여자와 동행한다면 칼로리가 적은 OO메뉴를 권하고, 세트가 값은 싸지만 해로운 감자튀김이 껴있으니 300원 추가해서 양파튀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마트에서 햇반 하나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한 회사 제품이라도 쌀 산지에 따라 맛이 다르다. 찰진 맛이 좋으면 전라도 쌀, 기름진 게 좋다면 경기도 여주 쪽…. 작은 것으로도 일상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게 식도락이다."
-인기 많겠다.
"음식 추천해달라고 해놓고 돌아서서 딴 소리 하는 이들도 많다. '이상한 친구야. 먹는 거나 밝히고….'음식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왜이래, 밥맛 떨어지게…'하기도 하고. 회식할 때 같은 값에 더 좋은 음식점 소개하면 '그게 그거지 뭘 거기까지…'하며 피곤해하는 이들도 있다."
-돈도 많이 들겠다.
"생각만큼 안 든다. 동호인끼리 함께 움직이면 교통비도 절약되고, 먹을 만한 음식을 몽땅 시켜서 공유하니까 적은 돈으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비용은 무조건 1/N이고. 때마다 다르지만 요즘은 월 60만~70만원 정도. 어차피 밥 먹으려면 다들 돈 쓰지 않나."
-서로 견해가 엇갈릴 때도 있을 텐데.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 맛도 배우고, 사는 것도 배우고. 가령 누가 '요즘은 젓갈이고 뭐고 죄다 너무 싱거워지더니 이 집 간장게장도 싱겁네'하면 곁에서 또 누가 '짠 게 몸에 안 좋잖아'하죠. 그럼 또 누가 '짜면 적게 먹으면 되지. 음식마다 절대기준이라는 건 있어야지.' 그런 식.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폭넓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食遊記(식유기)를 그는, 식당 이름과 사진까지 넣어 블로그에 올린다. 2003년 엠파스 시절부터 야후에서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가 올린 포스팅 수가 무려 2,000여 건. 복날의 민어횟집서부터 대학가 분식점까지, 건달들을 끼고 장사한다는 유흥가 24시간 고깃집서부터 3대 전통의 설렁탕집까지, 그는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내지르듯 거침 없이 쓴다. 적어도 그렇게 쓰는 듯 보인다. 그의 글을 반기는 네티즌들은 그러니까, 그 까칠한 스타일에서 순정을 느낀다. 신뢰의 거름으로 순정만한 것도 없다.
-곤란한 지경도 더러 겪겠다.
"많다. 첫 반응은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는 거다. 불응하면 곧장 협박이 시작된다. '옆구리에 칼…', '가족들…' 험한 말이나 덧글이 집요하게 반복되면 견디기 힘들다. 소송을 건 적도 있다. 막판에 합의해줬지만. "
-대신 보람도 있을 텐데.
"작년 여름에 누가 서울 강남에다 산곰장어를 요리해 파는 식당을 개업했는데 하필 유명하고 큰 음식점들이 즐비한 동네 후미진 데였다. 요리 솜씨와 맛만 믿고 시작했다는데 문제는 입소문 나기까지 버틸 만큼 자본금이 넉넉하지 않다는 거였다. 벼랑에 몰린 식당 주인이 내 블로그에다 사정을 설명하며 방문 요청을 했더라. 해서 가봤더니…, 과연 좋더라. 서울서 산곰장어 맛 제대로 볼 수 있는 집, 드물다. 그런 식당은 살아 남아야 한다. 맛 보고 느낀 대로 성의 있게 써서 올렸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요즘 그 집 음식 맛보려면 번호표 받고 기다려야 한다."
-초대받아 갔는데 음식이 시원찮으면 어쩌나.
"나를 부를 정도면 웬만큼 자신 있다는 거다. 그래도 안 좋은 얘기를 쓸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면 주인에게 묻는다. '이건 좋은데 저건 아니다' 그렇게 써도 좋은지 물어보는 거다. 주인이 원치 않으면 안 쓴다. 공짜 밥 먹었다고 없는 얘기 쓴 적은 없다."
-유혹도 있을 텐데.
"많다. 공짜 음식 얻어먹는 욕심, 용돈벌이 욕심…, 그러다가 아예 경계를 넘어서는 이들도 있다. 아마추어 문패를 달고 이미 프로가 돼버린 파워블로거도 있다. 순수성 신뢰성이 마케팅에 악용되는 거다."
장르마다 다르지만, 화장품이나 가전제품 카메라 등 '신제품 리뷰 올려주면 얼마'하는 식의 크고 작은 유혹은 거의 일상이라고 했다. 요리 블로거 중에는 조미료 신제품에 자신의 이름까지 빌려준 경우도 있고, 열심히 덧글다는 '이웃'에게 업체에서 협찬 받은 고가의 조리기구를 10대씩 경품으로 나눠주는 블로거도 있다고 한다.
"당신은 신문기자니까 방송을 예로 들자. '영화배우 OO의 단골맛집'하는 식의 방송프로가 있다. 하지만 단골집도 아니고 맛집도 아닌 경우가 많다. 곧 개봉하는 영화를 홍보해야 하는 배우의 필요, 가게를 선전해야 하는 식당의 필요, 그리고 협찬 받아 방송을 제작해야 하는 외주제작사의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 뒤에는 홍보대행사들이 있는데, 거긴 아예 메뉴판이 있다. '방송 3회와 일간지 4회, 주간지 4회, 케이블 3회 무가지 6회 패키지로 3,000만원' 그런 식이다. 식당 주인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배짱 아니면 그 유혹 뿌리치기 힘들다. 내가 안 하면 옆집에서 할 거니까. 기자ㆍPD 역시 안면 무시하기 힘들다. 결국 피해는 소비자가 보고, 정직한 영세 맛집들이 보게 된다. 블로그가 그 석연찮은 네트워크의 대안으로 주목 받게 된 거다. 그래서 파워블로거도 생기는 거고. 그런데 이제…."
추문에 환멸을 느껴 그만둘까 생각한 적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전 같은 식당 설렁탕을 한 달 뒤에 다시 먹어도 사진을 찍어요. 그 사진을 보면 함께 했던 사람, 나눈 이야기, 분위기, 그날의 음식 맛 등이 떠오르거든요. 블로그는 제게 일기 같은 거예요. 추문과 오해는 경계해야겠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갈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기가 외식문화를 개선하는 소비자 주권운동의 방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식품에 이물질 나왔다고 업체에 항의하면 돈도 주고 종합선물세트도 갖다 주죠. 식당도 밥값 안 받고 덤 요리 서비스도 합니다. 그걸로 끝내면 절대로 개선되지 않아요. 업체나 식당 주인 입장에서는 라인을 개선하는 비용보다 종합선물세트 비용이 훨씬 싸니까요. 식당이 좋아지려면 소비자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똑똑해져야 해요. '진국설렁탕'이라면서 메뉴에 '수육'이 없는 집도 있어요. 진국 내면서 삶은 고기는 뭐 한다는 얘깁니까? 머릿고기 없는 순대국집은 또 뭡니까. 그런 집 찾아가는 건 동해안으로 대하 먹으러 가는 것과 같아요. 전어는 연중 잡히고 9월 중순부터 어획량이 늘지만 기름이 올라 '가을전어'이름값을 하려면 11월말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신문ㆍ방송은 9월 중순부터 난리를 피우죠. 그 보도에 혹해 소비자들은 또 산지로 몰려가고…."
그의 말은 틈 없이 길고 쉴 새 없이 빨랐다. 하지만 그 다변과 능변은 습관이나 훈련으로 밴 것 아니라, 쌓인 것들이 제 압력으로 터져나올 때 보일 법한 그런 양상, 그런 다변이었다. 그의 성능 좋은 마이크로도 실어낼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파워'의 그늘 같은 것-이 많은 듯 보였고, 그 삶을 그는 즐기면서도 버거워하는 듯했다.
■ "음식 얘기만 하면 되지… 10년 동안 본명 모르는 회원도"
"만난 목적이 뭐든 우린 쉽게 고향이 어디냐? 학교는? 직업은? 나이는? 결혼은? 심지어 사는 곳은? 따위를 물어요. 그거 우습지 않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뭔 말을 묻기도 전에 그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식도락 취미로 만났으면 함께 음식 먹고 맛을 즐기고 맛에 대해 대화하면 되지, 누가 재벌2세든 실직자든 무슨 상관이냐는 거였다. 직전에 뭔 일을 겪었을 수도 있지만, 짐작하건대 그는 '파워블로그 건다운'에 대해서는 말하겠지만 그 밖의 '박태순'은 묻지 말라는 엄포 같았다. 어렵사리 마련된 자리였다.
"동아리 회원 중에는 10년씩 만나면서 서로 본명을 모르는 이들도 있어요. 그 중 한 명이 얼마 전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병원 영안실 앞에 가서 난처했죠. 다들 '맛의 달인' 본명 알아? 서로 묻는 식이었어요. 일이 있어서 직장에 전화를 했다가 '나이는 40대 중반이고 중키에 살짝 벗겨졌고…'그런 적도 있어요."
그는 온라인 닉네임을 갑옷 같은 거라고 했다. 직업이나 신분의 편견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평등하게 타인 앞에 나설 수 있게 해주는 갑옷.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그 원칙은 철저히 유지해요. 누가 2차는 자기가 내겠다고 해도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는 40대 중반이며, 더 젊어서는 대형 건설회사를 20년 가량 다녔고, 공ㆍ사적인 일로 국내외 출장ㆍ여행이 잦아 다양한 문화와 음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현재는 자영업을 하고 있지만 음식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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