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결혼식도 봤고, 어머니의 결혼식도 봤다. 정식으로 참석한 것은 아니고 숨어서 몰래 봤다. 부모님이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데다 정작 내 결혼식 때는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신부 집에 보내는 함도 내 손으로 직접 챙겼다. 이것 하나만 봐도 내 인생이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분이 이혼할 때 나는 속으로 '내가 외아들이니까 어머니가 데리고 가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분이 어떻게 합의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혼자 남았다. 그리고 외할머니 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슬프고 힘들고 괴로웠다. 반항심에 삐딱한 행동을 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생활이 힘들어서 그랬지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별로 없었다. 두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두 분에게 나는 평생 고통스러운 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면서도 책임질 수 없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머니는 노년에 미국 LA에서 사시다가 2008년에 돌아가셨다. 몸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셨는데 그래도 내가 가면 꼭 시내로 쇼핑을 가자고 하셨다. 내 나이가 쉰 살이 넘었을 때도 어머니는 "너는 공인이니까 옷을 깔끔하게 입고 다녀야 해"라며 직접 옷을 골라 주셨다.
언젠가 어머니가 손녀를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 아이를 보니 내가 정말 너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걸 알겠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혼자 살게 했으니…." 그때 내 큰딸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한 번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네가 내 자식이지만 내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주지 못해 네가 잘못 나갈 때도 아무 말을 못했다. 그럴 때면 정말 가슴이 아프더라."
그 말이야 말로 내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가장 가슴 아픈 말이었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 혼내고 나무라는 것은 부모의 권리이자 의무다. 그런데 스스로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를 보며 나는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는 너무 착해서 네 몫을 못 찾았다.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준다고 울어야 더 마음을 쓰는데 너는 말없이 살아서 신경을 많이 못 썼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운명이 혼자 가게 돼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 힘겹게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두 분은 무척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내게 뭔가 길을 열어주고, 뭔가를 주고자 하셨다. 내가 군 제대 후 힘겹게 대학을 다닐 때 어머니는 "유학을 가면 어떻겠냐"며 돈을 마련해 오셨다.
1970년대 초 아버지는 군 장성이셨다. 그런데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선고 받았다. 간신히 사형은 면했지만 이후 아버지는 굉장히 힘든 처지가 되셨다. 그 힘든 시절에도 아버지는 내 하숙비를 한 번도 거르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어떻게든 나를 책임지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내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셨다. 누구를 찾아가면 200만원을 줄 것이니, 그 돈으로 홍콩에 있는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군에서 고초를 겪으신 탓인지 말년에는 당뇨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느 날 경기 때문에 광주에 갔다가 올라오는데 예감이 참 이상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는데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그때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지금도 뼈에 사무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홍콩에 계시던 어머니께는 연락하지 않았다. 혈압이 있는 데다 심장도 안 좋으셔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네 아버지 돌아가셨지?" 어떻게 아셨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는데 하얀 옷을 입은 채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러 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린 외아들을 두고 이혼하셨던 두 분은 그렇게 마지막 이별을 한 것이다.
현재 나는 큰 부족함이 없다. 사회적 위치도 어느 정도는 되고, 재산도 먹고 살 만큼은 있다. 무엇보다 내가 꿈꿨던 단란한 가정도 이뤘다. 만일 어렸을 적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보다 못한 처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불행했던 과거들이 이제는 더 이상 불행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자산이다. 투병생활 후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내 성격이 장점이 될 수 있도록 나를 허허벌판에서 자라게 하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총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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