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연구자'로 글을 쓰고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직함'이 실은 좀 불편하다. 간혹 매체에 따라서 '작가'로 소개되는 경우도 그렇다. 말이 좋아 '독립'이니 '자유'지, 낯 뜨겁기는 매한가지다. 소속이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실제의 나와 상관이 있든 없든, 어디의 누구 하면 그 사람의 성취를 평가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 논란 때문에 뒷북치는 느낌이지만, 오래 전부터 자서전이나 참회록 같은 걸 쓰게 된다면 제목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 바로 '나는 ΟΟ다'였다. ΟΟ가 무엇이냐는 좀 고민이었지만.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그럴 듯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 비슷한 착각을 버리기 전이었을 것이다.
, 등에서 보듯이, '나는 ΟΟ이다'는 자기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제목일 터, '나는 박물관이다' '나는 작가다'로 한다면 박물관과 글 쓰는 일이 내 존재를 대변해 주는가가 관건이다. 아니 그럴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영화 에서처럼 사랑은커녕, 모든 것을 다 걸 만한 파격적인 다른 뭔가가 있지도, 또 앞으로 있을 법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누구'라는 관계 속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내 시인 김광규 식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딸이고 어머니고 동생이고 아내고 제자고 선생이고…. 친구고 적이고 손님이고 주인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지 않은가.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밥 딜런의 전기 영화 는 또 다른 혼란이었다. 그토록 뜨거웠던 그의 삶에 그는 거기에 없다니.
그런데 을 읽다가 굳이 내가 단 한 가지로 불려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적이나 인색하고, 고귀하나 이기적이며, 호언장담하는 동시에 꾸밈없이 말하고, 용감하면서 비뚤어지며, 관대하고 포악한 사람, 처칠"을 읽는 방법은 "우리가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또 그런 만큼 타인의 삶을 요약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 준다. 그건 내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간의 논란과는 별개로 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늘 안전선 밖에서 데면데면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내게는 그 치열한 '투쟁' 자체가 경이였다. 내 옆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가수가, 모델이, 디자이너가, 아나운서가 물었다. 너는 박물관이냐고, 작가냐고. 재주 있는 놈 위에 재수 있는 놈 있다고, 재주보다 더 큰 재수로 이나마 살아 온 게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도 돌아보게 했다.
또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꼭 그렇게 한 가지 꿈에 매달려 무엇이 되어야만 성공한 인생일까, 그들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동안 버리고 놓치고 후회한 일들은 없었을까.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혀야 할까.
모든 선택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는 법이라니,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라는 노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프리츠 오르트만)는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리겠지만 타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몫이겠다. 어느 쪽이건 좋은 삶, 나쁜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