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의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를 두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4월 초 국무회의에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독립유공자 19명의 서훈을 취소하기로 의결할 때, 논란의 중심에 위암 선생이 있었다. 선생이 을사늑약(乙巳勒約) 사실을 폭로하면서 황성신문에 쓴 사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배운 이래 한말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선생의 의분과 용기, 독립 투쟁과 고고함을 익히 들어왔기에 필자 또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존경보다 공동체 가치 앞서
위암 선생이 너무 위대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을까, 선생의 약점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의아해했고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약점이 노출되었다 하더라도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런 존경심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약점까지 감싸려고 하는 유혹을 받을 때다. 고민스러운 것은 그 약점이 실정법에서 규정한 어떤 규범에 저촉될 때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그 분에 대한 예의일까 하는 점이다. 자칫 그런 개인적 존경심이 공동체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바람직할까. 개인적인 존경과 사회적인 규범이 양립되지 않을 때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같이 존경심과 사회적 규범이 부딪치는 곳에 위암 선생의 '서훈 취소'가 자리하고 있다.
공직에 몇 년 머물렀던 덕분일까, 위암 선생의 서훈 취소와 관련하여 정부의 고충이 얼마나 깊었을까를 읽을 수 있었다. 김황식 총리가 "친일 행적과 별도로 독립운동을 위한 공도 인정되는 만큼 그 부분을 별도로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서훈이 취소되는 것은 마땅하다"고 한 데서도 고충은 읽혀진다. 여기에는 정부의 결정을 뒤집는 데 따른 부담감마저 느낄 수 있다.
1962년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을 시작할 때,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거의 50년 전의 일이다. 듣건대, 이번 취소를 두고 정부가 판단의 일관성에 흠집을 냈고 포상 행정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켰다는 지적이 있다고 한다. 옳다. 때문에 정부는 이런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선생이 건국훈장을 받았을 때는 그의 행적이 '시일야방성대곡'정도만 알려졌을 뿐, 그 뒤의 행적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쓴 친일 경향의 글이 알려지면서 문학 쪽에서 이 사실을 발굴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 '친일인명사전' 간행보다 꽤 오래 전이다.
서훈 취소와 관련,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생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지 않았는데도 서훈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그렇게 결정한 것은 선생에게 '친일 행위'가 없었다는 것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 위원회에서 논란되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가 '친일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선생을 그 '법'에 따른 적극적인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지 않았을 뿐, 그렇다고 독립유공자로서 품위를 그대로 유지한 분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족 상처 덧나지 않게
이번에 19명의 서훈이 취소된 것은 그들을 '친일파'로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공적이 있더라도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인사에 대해서는 그 서훈을 취소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자기 신뢰를 담보로 자신의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에 상처받는 쪽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분들과 그 유족이다.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숙한 시민들은 답을 알고 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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