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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정가의 정풍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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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정가의 정풍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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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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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쇄신 주역, 내일은 쇄신 대상 되기도…돌고 도는 정치 패러독스

‘문란해진 태도나 기질을 바로잡음’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정풍(整風)’. 정치권에서 정풍운동은 ‘당 쇄신을 위한 인적 청산’의 의미로 곧잘 받아들여진다. 당의 모습을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데 앞장선 정풍운동 주역들은 단숨에 정치적 거물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적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정풍운동의 타깃이 되거나, 신진세력에게 밀려 정치 무대에서 쓸쓸하게 퇴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른바 돌고 도는 ‘정풍의 파라독스(Paradoxㆍ역설)’다.

현대 정치사에서 정풍운동의 기억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인 1979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종필 의원이 여당인 공화당 총재직에 오르자, 당시 박찬종, 오유방 의원 등 소장파 의원 10여명은 ‘부패 정치인 퇴출’을 명목으로 실세였던 이후락, 김진만 의원 등의 퇴출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박 의원은 유망한 새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박 의원은 87년 대선 때에는 조순형 홍사덕 이철 의원 등과 함께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등 새로운 쇄신운동을 벌이자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는 92년 신정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어 김동길 의원 등이 주도하는 국민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각목 사태’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그 뒤 신한국당-국민신당 등으로 당적을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정계를 떠난 상태다.

군부 정권인 전두환ㆍ노태우 정부에서는 이렇다 할 정풍 운동이 없었지만, 김영삼 정부 때는 당시 신한국당 초선 의원이었던 이재오 현 특임장관과 홍준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김문수 경기지사 등이 똘똘 뭉쳐 ‘쇄신’을 외쳤다. 이들은 초선의원 30여명과 함께 ‘시월회’를 조직해 97년 노동법 개정 날치기 사태 책임자 문책과 여권 내 한보 사건 관련자 퇴출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이 장관은 한나라당 소장파로부터 ‘쇄신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고, 홍 전 최고위원도 소장파와 쇄신의 정당성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상황을 맞게 됐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말 정동영 현 민주당 최고위원은 ‘천ㆍ신ㆍ정(천정배ㆍ신기남ㆍ정동영) 협공’을 통해 최고 실세였던 권노갑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의 2선 후퇴를 주장하며 정풍운동의 대명사가 됐다. 정 최고위원은 일약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르며 노무현 정부 때 열린우리당 의장을 거쳐 2007년 대선에 출마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정 최고위원도 대선 패배 후 책임론에 휘말렸고, 지금은 야당의 비주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엔 민주당 내 개혁파 초선의원 12명으로 구성된 ‘새벽21’이 당정 전면쇄신을 요구했다. 당시 목소리를 높였던 멤버 중엔 정범구 이종걸 정장선 의원과 송영길 인천시장만 현역으로 남아 있고, 김성호 장성민 전 의원 등은 여의도 정가를 떠난 상태다.

한나라당에서도 17대 총선을 앞두고 있던 2003년 말, ‘남ㆍ원ㆍ정(남경필ㆍ원희룡ㆍ정병국)’이 주축이 된 대대적 쇄신 운동이 벌어졌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초선 의원 19명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대패한 뒤 전신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핵심 인사들을 지목해 총선 불출마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권 창업 공신들이 정부 출범 직후부터 주류 내 인적 청산을 요구한 것이 특징이다.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는 정두언 전 최고위원 등 소장파 세력들이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6월엔 정 전 최고위원이 이상득계인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당시 대통령실 기획조정비서관)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공격해 박 차관을 물러나게 했다.

또 최근 정 전 최고위원과 남경필 정태근 의원이 주축이 된 소장파는 당 쇄신이란 명분을 앞세워 이재오 특임장관 등 친이계 주류의 재보선 패배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정풍운동의 파라독스는 우리 정치사에서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 과거 정풍운동 주역 박찬종

박찬종(72) 전 의원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한나라당의 쇄신놀이, 치열한 반성부터 해야 한다. 차기 공천 바라고 계파 보스 눈치 살핀 일, 장관 하려고 MB에 아양 떨고 시킨 대로 한 일, 국민 앞에 석고대죄부터 하라”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1979년 10ㆍ26 직후 재선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당내 정풍 운동을 주도하다가 이듬해 당으로부터 제명 당했다.

그는 13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쇄신운동은 의원들이 헌법 46조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헌법 46조는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3년 전부터 계파이익과 당론보다 국익을 우선시했다면 쇄신은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풍 운동을 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뒤 정계를 떠났다. 그는 1979년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에게 부패 정치인 퇴진을 요구했고 이후 여권의 일부 실세들이 정계를 떠났다. 그는 “당시 나는 집권여당이 체육관 선거로 재집권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라며 “공화당의 과오를 인정하고 기득권을 버리고 야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쇄신이 성공하기 위한 요건으로 ‘진정성’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뜻을 같이했던 공화당 소장파의 다수는 전두환 정권(민주정의당)에 투항함으로써 정풍이 소용없게 됐고 그렇지 않았던 나는 현실정치에서 소외되고 말았다”며 “이후 전두환 정권의 삼고초려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득권에서 배제될 각오를 한 사람이 쇄신의 중심에 서고 꾸준히 실천해야만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에서 쇄신에 앞장선 의원들이 자기반성부터 했는지 의문”이라며 “똥차가 똥을 치우지 않고 색칠만 다시 한다고 달라지느냐”고 일갈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 정권 말기마다 정풍운동 왜?

정치학자들은 정풍(整風)운동을 “한국의 권력정치 속성상 정권 말기마다 반복되는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대통령의 임기 말 국정 장악력이 약화되고 당의 기강도 흐트러지는 과정에서, 차기 총선이나 대선의 위기감을 감지한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풍운동의 싹이 튼다는 것이다.

여기엔 ‘쇄신’을 앞세워 당청(黨靑)관계 재정립이나 당내 세대교체 등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국민심판을 받아야 선거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략적 성격도 가미돼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정풍운동은 민심 이반과 함께 나타나는데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정점에 이르는 시점이 주로 집권 4년차 전후”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당의 노선, 운영방식 등을 바꿀 것을 고민해야지 지도부 얼굴만 바꾸는 식의 쇄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 여야 각 정당에서 벌어지는 쇄신의 바람 속에 이런 필요충분 요소가 얼마나 포함돼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이번 한나라당의 쇄신운동은 4ㆍ27 재보선 패배와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패, 내년 총선을 앞둔 의원들의 위기감이 맞물려 일어난 것”이라면서 “모든 정당 체제를 일거에 쇄신하기 어려운 만큼 가능한 것부터 쇄신하는 점진적, 지속적 정풍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풍과 쇄신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민심에 따라 정당이 변하려는 노력은 당연하기 때문에 쇄신운동을 회의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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