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박정희 지음/걷는책 발행·272쪽·2만8,000원
"큰 딸 아이(명애)가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니까 그림책을 사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뭘 사주나 하고 봤더니 스토리가 마음에 들면 지질이 나쁘고 지질이 마음에 들면 스토리가 비교육적이야. 삽화도 엉터리여서 싫구나 하는 게 있더라고. 그래서 사주질 못했지."
박정희(88) 할머니가 딸 넷 아들 하나 자녀들에게 육아일기를 써주기로 한 건 글을 깨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보여줄 책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려주마, 써주마"고 결심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육아일기, 제대로 말하면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동안 인상적인 일화를 담은 이야기 책 5권이 각각 30~50쪽짜리 수제본으로 탄생했다. 변변한 종이가 없어 교회에서 버린 악보 뒷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때도 있었다. 표지는 배냇이불로 쓴 홑청 조각을 오려서 대기도 했다.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는 일제강점과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망과 웃음, 사랑과 배려를 잃지 않고 살아온 한 가족의 사적인 기록이다. 박정희>
박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한글 말살 정책을 걱정해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교육과 기독교 선교에 헌신한 송암 박두성(1888~1963) 선생의 둘째 딸이다. 경성여자사범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집이 있던 인천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평양의 가난한 의사 집안에 시집갔다. 큰 딸 명애가 태어난 45년 광복 무렵부터 딸 현애, 인애, 순애에 이어 막내 아들 제룡이 일곱 살이 된 1960년대 중반까지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누가 뒷바라지 해줬고 그때 살던 집은 어땠고 식구들은 누구이며, 어릴 적 모습은 어땠는지, 어떤 놀이를 좋아했고 별명은 무엇이고, 백일이며 돌잔치 때 받은 선물들은 무엇인지 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전혀 별스러울 것도 없어 보이는 책이라고 여길 게다. 그런데 왜 읽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할까, 눈시울이 뜨거워질까.
동네마다 유아전문 사진관이 하나씩은 있고 인터넷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육아일기가 넘쳐나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만나기 힘든 직접 쓴 정갈한 글씨와 차분하고 단정한 문장의 매력 때문일까. 해방 후 첫 딸을 업고 결행한 월남,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아이들을 키워낸 그 고통스런 세월을 동정하기 때문일까. 그런 시절을 저자인 박 할머니가 아이들과 행복하고 즐겁게 겪어내는 모습에서 오는 감동일까.
셋째 딸을 낳고 한 달 만에 6ㆍ25가 터졌다. 박 할머니는 그 해 일을 이렇게 썼다. '비행기 폭격, 함포, 불 모두 말할 수 없이 무서웠으나 넓은 방 넓은 마루를 기어 다니며 노는 너에게는 아무 일 없었다. 할아버지 품에 안겨 내가 불 끄러 밤새도록 다니다 와도 울지 않고 자는 너였다.' 비슷한 시기 큰 딸 여섯 살 적 일기에는 '"우리 재미있게 피난 가는 장난하자!" 너희들은 이러한 소리를 매일하며 할아버지는 지붕에서 유엔군 비행기들의 유희하듯 폭격하는 구경을 하시고, 나와 순임이는 벼를 매에 갈아 현미밥을 짓고 보리쌀을 곱게 갈아 죽도 쑤고 고구마 순을 다듬어 된장국도 끓이고 하여 무서운 생각은 아니하고 캘캘대며 날을 보냈다.'
박 할머니는 "삭막하기 그지 없는 환경이었지만 내가 육아일기를 쓸 때 아이들은 할아버지한테 가서 '오늘은 엄마가 내 거 쓴대요' 하고 자랑하고 그랬지. 엄마 그림에 나온 할아버지가 꼭 닮았다고 아이들이 그러면 할아버지는 또 '엄마 그림 솜씨야 사진기자지 뭐'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고 말했다. 이렇게 써 놓은 언니의 육아일기를 동생이 커가며 매일 재밌게 읽고 아예 달달 외울 정도가 돼 따로 한글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 육아일기의 매력은 어쩌면 책을 넘어선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육아일기를 선물로 주기 위해 매일매일 일어났던 일을 메모하는 박 할머니의 세심함, 그 일들을 곱게 새로 기록하고 수채화와 사진까지 덧붙이는 정성, 육아일기를 쓰면서 아이들과 웃고 즐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엄마들은 너무 애들을 죽이는 거 같아. 공부에 진저리가 나게 하는 거 같아."
10년 전에 처음 나와 몇 년 인기를 얻었지만 그 뒤 절판 상태였던 이 책을 다시 내놓으며 박 할머니가 요즘 젊은 엄마들한테 일러주는 '육아론'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과외를 시키거나 성적표 운운하거나 너는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 이런 생각 꿈에도 안 했다. 아이들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강요하면 안 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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