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70만년 전 동아프리카. 눈 위 뼈가 툭 튀어나오고 뒷머리가 길쭉하니 외계인처럼 생긴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이들은 주먹 크기만한 도끼를 돌로 만들어 사냥하고, 불을 피워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 더 나은 잠자리와 식량을 찾아 무리 지어 이동해 유럽과 아시아로 삶의 터전을 점점 넓혔다.
한편 15만~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선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이들 역시 아프리카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이미 곳곳에 살고 있던 호모 에렉투스와 부딪혔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렉투스보다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썼고, 언어도 발달시켰다. 지능도 더 뛰어났다. 결국 호모 에렉투스는 경쟁에서 뒤처져 멸종했다. 호모 에렉투스 이후 등장한 네안데르탈인 역시 호모 사피엔스에 밀려 사라졌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아 지금의 인간으로 진화했다.'
이른바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이다. 우리의 조상은 호모 사피엔스고, 이들이 처음 출현한 아프리카가 60억 인류의 고향이란 것이다. 지금까지 정설로 여겨졌던 아프리카 기원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근 아시아에서 발굴된 호모 에렉투스의 유물들 때문이다.
아시아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
문제의 유물은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93km 떨어진 드마니시 지역에서 나왔다.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가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석기 등 120여 점이다. 이 도구들은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 등장 시기보다 약 10만년이 앞선 177만~185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됐다.
2002년 이곳에선 이미 '드마니시인'으로 이름 붙여진 호모 에렉투스 유골이 발견됐다. 이 화석의 연대는 아프리카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한 시기보다 이른 180만년 전으로 나와 호모 에렉투스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반박하는 근거로 쓰였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여기에 좀 더 힘을 보태는 연구결과다.
드마니시인들의 유물을 발견한 미국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은 아주 오래 전 아프리카를 떠난 원시인류가 어딘가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했고,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다가 그 중 일부가 아프리카에서도 살게 됐다는 해석을 내놨다. 박선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도 "드마니시인은 아프리카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부정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경쟁했던 게 아니라 에렉투스가 진화해 사피엔스가 됐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과 노스텍사스대 연구진의 해석을 종합하면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처음 등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같은 종인가 아닌가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흔드는 연구는 이번 발견 전에도 있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아예 다른 종으로 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른 종 간에는 자손이 생기지 않는다. 비슷한 종끼리 만나 자손을 낳더라도 그 자손은 번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전자가 후세에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말과 당나귀가 만나 나온 노새가 좋은 예다.
그러나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진은 지난해 "지금의 인류가 갖고 있는 유전자의 1~4%가 네안데르탈인에서 왔다"고 밝혔다. 중국과 프랑스, 파푸아뉴기니, 아프리카 사람과 4만여 년 전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비교해 얻은 결론이었다. 연구진은 5만~8만년 전 중동지역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가 그곳에 먼저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피가 섞인 뒤 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퍼졌다고 추측했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였다는 건 서로 같은 종이라는 얘기"라며 "이는 아프리카 기원설로는 설명할 수 없고, 다지역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라고 해석했다.
다지역 기원설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훨씬 전에 출현한 원시인류가 진화해 현생인류가 됐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은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를 서로 다른 종으로 구분하지 않고 인류가 진화하며 겪은 과정이라고 본다.
고향 찾기 언제까지
다지역 기원설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독일 연구진이 주목한 유전자에 대해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공통 조상이 갖고 있던 유전자일 수도 있다"며 또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1~4%의 유사 유전자만으로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을 같은 종으로 보긴 무리라는 설명이다. 지금으로선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임종덕 문화재청 천연기념물센터 학예연구관은 "과거 시대별 인류의 화석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면서 아프리카 기원설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졌지만, 최근 이 가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각 가설을 뒷받침하는 유전자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의견은 더욱 분분해졌다. 인류의 고향 찾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변태섭 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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