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탄 3발 맞았는데 진급 차별… 표창도 버렸다
"참모총장 표창이요? 쳐다보기도 싫어 내버렸어요."
23일 서울 공항동 자택에서 만난 예비역 소령 이종갑(55) 씨는 1996년 그 날의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를 쳤다. 무장 침투한 북한군의 총탄을 3발이나 맞았으니 몸서리칠 법도 하건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차라리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사지(死地)에 투입됐던 부하들을 외면하는 군 지휘부의 냉대와 차별은 견딜 수 없었죠."
꼭 잡고 싶었다, 내 몸을 던져서라도
이 씨는 군 생활 18년 중 10년을 북파공작원(HID) 교관으로 근무했다. 대북침투조를 양성하는 극비 임무다. 이 씨 자신도 강하훈련, 수중폭파훈련 등 온갖 특수훈련을 마친 정예 요원이었다.
96년 9월18일, 북한군 25명을 태운 잠수함이 강릉 대포동 앞바다에서 좌초된 채 발견됐다. 침투 당일 이광수는 민가에 숨어있다 잡혔고 이후 11명은 자살, 11명은 교전 끝에 사살됐다.
이들은 모두 잠수함 승조원에 불과했다. 핵심은 살아 남은 나머지 2명이었다. 김정일이 "1개 사단 병력(8,000~1만 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한 최정예 침투조였다.
이 씨는 당시 육군 3군단 정보분석장교로서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짰다. 하지만 남은 2명은 보란 듯이 칠성산, 홍천, 오대산 등 강원도 일대를 누볐다. 공수부대와 특전사, 특공여단이 저격조로 투입됐고 군인과 예비군 수천 명이 가세했지만 좀체 소득이 없었다.
이 씨는 "침투조가 향로봉을 거쳐 북한으로 되돌아가면 끝장이었다. 또한 단풍철이라 설악으로 넘어가면 민간인 피해가 우려됐다. 그래서 촘촘하게 포위망을 짜고 운신의 폭을 좁히는데 주력했다. 자연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군 2명은 포위망을 농락하며 병사와 민간인들을 조준 사격했다. 시신을 흔적 없이 묻어 출동한 경찰이 허탕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아군끼리 오인 사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사와 민간인 15명이 죽고 10여명이 다쳤다.
그는 "저들의 눈에는 사방이 손쉬운 표적이었다. 우리는 울창한 숲 속에서 단 2명을 잡아야 했다. 인명피해가 늘고 세간의 지탄이 쏟아지면서 피가 말랐다. 빨리 끝내야 했다"고 말했다.
세 발의 총성, 추격의 끝
침투 49일째인 11월5일 새벽, 강원 인제군 용대리에서 초병들이 북한군과 교전했다. 이 씨는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되뇌이며 현장에 출동했다. 탄피를 분석하며 도주방향을 예측하던 순간, 해가 막 떠올라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사이 숲 속에서 "탕, 탕, 탕"하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첫 발은 이 씨의 왼팔 윗부분을 관통해 뼈와 살이 뜯겨졌고, 나머지 두 발은 팔꿈치 아랫부분을 스쳤다. 계속되는 총격에 근처에 있던 장교 3명과 병사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북한군 2명은 뒤쪽에서 덮친 특전사 요원들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기나긴 추격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은 1명이 더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 씨는 "다음 날 바로 작전이 종료됐다. 북한군이 더 있었다면 그랬겠나"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군 당국도 "놓친 북한군은 없다"는 입장이다.
이 씨는 "너덜해진 왼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했지만 병원 수술실에 들어가서야 통증이 밀려왔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고 말했다.
부상은 심했다. 오른다리 정강이 뼈를 잘라 왼팔에 붙이고 혈관도 이식했지만 뼈와 근육을 간신히 연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살은 여전히 움푹 파여있고 왼팔과 왼손가락은 힘을 쓰지 못한다.
훈장 못 받고 진급도 탈락, 군이 나를 버렸다
그래도 망가진 몸은 상관없었다. 진짜 시련은 그 다음이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자 육군 3군단은 "치료기간이 길어져 소속부대가 바뀌었다"며 관사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졸지에 가족들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900여 만원의 병원비도 절반 정도는 본인이 먼저 내고 몇 년이 지나 할부로 나눠 받는 방식이었다.
작전이 끝나자 40여명이 훈장, 20여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부상자들은 모두 참모총장 표창에 그쳤다. 그는 "작전에 참여하지도 않은 군 고위층이 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거들떠도 안보더라. 이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97년, 중령 진급심사가 있었다. 그는 전상(戰傷)을 입었고 과거 최우수 교관으로 선정되는 등 촉망 받는 군인이었기에 진급 1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탈락했다. 이 씨는 "주변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심지어 지뢰지역에 잘못 들어가 다리를 다쳐도 진급했다. 난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 뛰어들었지만 비주류인 3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차별을 견디며 더 이상 군에 남을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역 후 잇따라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지금은 연금과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두 자녀를 賓帽竄置求?형편이다. 반면 당시 침투했던 북한군 이광수는 해군 군무원에 채용돼 정신교육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조적인 처지에 억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씨는 "그런 생각은 단 한번도 안 했다. 그도 나도 각자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씨는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손자병법에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이라고 했다. 결국 군인은 한 번 싸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몸을 바쳤기에 침투한 무장공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망신창이가 된 부하를 내팽개치면 어떡하나. 더 이상 나 같은 군인은 없어야 한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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