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따 당"
25일 오전 10시30분쯤 서울 중구 신한은행 광교영업점 대여금고실. 권해윤 서울시 38세금징수과장 등 시 공무원 4명이 숨죽이며 열쇠공이 금고를 강제로 여는 것을 지켜봤다. 금고의 주인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1997년 한보그룹이 부도가 난 후 정 전 회장의 총 체납액은 2,225억원이고 이 중 지방세는 70억여원이다. 서울시가 3월14일 붙인 압류 스티커 위에 국세청이 붙인 압류 스티커가 덧붙어 있었다.
드디어 금고 문이 열렸다. 금고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시 공무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권 과장은 "워낙 체납기간이 길어서 아무 것도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며 "10개를 개문했을 때 체납액에 상당하는 물품이 나오는 경우는 한 두 건 정도"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3월부터 1,000만원 이상 고액체납자 423명이 보유한 은행 대여금고 503개를 봉인하고 체납액 납부를 독촉해왔다. 대여금고가 봉인되자 유명 연예인과 전직 대통령의 친척 등은 밀린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비록 이날 정 전 회장 금고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서울시측은 다른 체납자들의 금고에서 뜻밖의 수확을 거뒀다. 지방세 3,100만원을 체납한 자영업자 황모(66)씨의 금고를 꺼내든 권 과장은 손에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 황씨는 3월초 자신의 금고가 봉인되자 "금고 안에 아무 것도 없으니 봉인을 해제해 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한 바 있다. 황씨의 금고를 열자 금 열쇠와 다이아반지, 금반지, 롤렉스 시계 등 5,000만원 상당의 귀중품 69점이 쏟아져 나왔다. 권 과장은 "아무 것도 없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나"며 혀를 찼다. 금고를 여는 것을 지켜보던 은행 관계자도 "지금까지 부도난 어음 등 값어치가 없는 것들만 나왔는데, 이렇게 귀중품이 나오는 것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서울시 38세금징수과는 이날 신한 등 3개 은행 8개 대여금고에서 일본 고서화 20점과 귀금속 78점을 압류했다. 시는 최근까지 100여개의 대여금고를 개문해 14개 대여금고에서 200여점 이상의 동산을 압류해 시청 내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 체납자들이 밀린 세금을 내지 않을 경우 올 하반기에 공매 처리할 예정이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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